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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석의 리액션] '허진호여, 얼룩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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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6-08-11 19:18:22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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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칸 영화제에서였다. 감독주간에 초청 받은 허진호 감독의 '위험한 관계'를 보았다.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소설이 파괴적인 사랑의 삼각관계를 다루는 고전으로 워낙 유명하여 이미 여러 차례 영화화되기도 했던 터라, 허진호 감독은 그걸 어떻게 다르게 창안했을까 호기심이 생겼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도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허진호 영화답지 않았다. 나는 허진호 영화에 공식적인 호의를 표명해 본 적이 없고 오히려 내가 쓴 것들은 비판론에 가까웠다. 하지만 허진호라는 이름이 1990년대 한국영화가 배출한 가장 근사한 축복 중 하나였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런 그의 영화가 그렇게 무너져 있는 것을 볼 때의 기분이 별로 좋진 않았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는 감독 허진호 보다는 촬영감독 유영길의 인장이 더 깊이 새겨져 있다는 호사가들의 지적(유영길은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촬영감독으로 한국영화사의 가장 뛰어난 장인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이나 허진호 감독이 촬영현장에서 번복이 많고 결단이 약하다는 스태프들의 불만을 들어 본 적은 있지만, 그런 말은 하기 쉬운 말들이다. 그런 말로 감독의 복잡하고 세밀한 연출의 공정을 함부로 판단할 순 없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또 내가 지지하지 않았다 해도 '행복'과 같은 영화는 쉽게 만들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 시절에 허진호 영화의 미덕은 영화가 어딘가 구식 감정을 애틋하게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유행에 휘둘리지 않는 그래서 구식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현재의 무리들로부터 한 발쯤 뒤로 떨어져 있는 그러나 절절한 감정의 표출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그 점이 아예 영화 한 편을 순박하고 소박한 어느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들었고 '봄날은 간다'에서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명대사를 오래 기억하게 했다. '행복'에서는 그게 지나쳐 이른바 신파로 빠져 버렸지만 그래도 그건 허진호 영화다운 단점이었다. 

'덕혜옹주'에 관련하여 허진호 감독이 나눈 인터뷰 문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영화의 원작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걸 보면서 이 작품을 해도 되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 말은 실망스러운 말이다. 한 감독이 대중적 무리의 숫자를 근거로 연출에의 확신을 갖는다는 건 나쁜 대중주의의 소산이다. 허진호라는 좋은 감독이 그런 나쁜 대중주의를 따를 때 영화가 자연스럽게 나빠졌을 것이다. '위험한 관계'의 실망스러운 결과물도 그렇게 나왔을 것이다. 

허진호 영화의 미덕인 구식 감정은 오히려 대중의 저항감 속에서만 빛을 발할 것이다. 가장 최신의 무리인 이 대중은 그 구식의 감정에 자기들의 유행이 얼룩지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작자는 혹은 허진호라는 창작자는 결국 그 얼룩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운명이 아닌가. 그럼에도 '덕혜옹주'는 그의 독특한 구식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대중을 위한 가장 최신의 옛날이야기에 불과한 것 같다.

대중을 위한 상품과 개별의 예술품을 마음만 먹으면 번갈아 만드는 감독이 없진 않다. 예컨대 홍콩 감독 두기봉이 그렇다. 허진호 감독이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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