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이유는 대개 내 집에서 그 영화를 볼 수 없거나 본다고 해도 극장에서만 한 환경과 품질로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란 극장 안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보아야 한다는 말은 씨네필의 공동체 의식을 부추기는 이상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나의 경우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좋은 영화에는 많은 관객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직업적 비평가이지만 사람이 적은 극장에서 좋은 영화를 볼 때 더 편안함을 느끼는 모순되고 이기적인 관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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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 AP연합뉴스 |
반드시 거기 가야만 원하는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사태는 미술관이 훨씬 더 심하다. 이것은 사진에 실려 있는 미술품을 본 뒤에 같은 작품을 미술관에서 직접 보는 경험을 몇 차례 하고 나서 내린 결론인데, 미술품을 사진이나 인쇄된 그림으로 경험하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책에서 본 '모나리자'와 눈앞의 '모나리자'는 달랐다.
어쩌면 이것을 이미지의 소유라는 문제와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령 영화 명작의 이미지를 한 편 소유한다는 것과 회화 명작의 이미지를 한 편 소유한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천지 차이가 난다. 영화는 기계 복제의 예술이고 회화는 진품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보는 것보다는 확실히 못 하겠지만 우리는 조금 욕심을 낸다면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을 블루레이로 소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우리는 앙리 마티스의 '춤'을 집에 두고 보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한다. 우리는 평생 벌어도 그 그림을 살 만한 형편이 못 될 것이다. 극장의 필름을 훔치는 소재의 영화는 거의 없지만 미술관의 미술품을 훔치는 소재의 영화가 많은 이유는 그 소유의 실현 가능성 차이 때문이다.
터무니없이 이상적으로 생각하자면, '만춘'의 이미지를 모두 동일한 고품질로 소유하고 즐기는 세상은 올 수도 있다. 모두 부유해져서 집에 좋은 설비의 극장(과 그리고 관계된 모든 것)이 다들 있다고 해보자. 그 때 '만춘'이 보고 싶다고 해보자. 굳이 극장에 가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상적으로 생각해 모두 부유해진다고 해도 마티스의 '춤'을 다 같이 소유할 순 없다. 집에 미술관(과 그리고 관계된 모든 것)을 지을 순 있다. 하지만 마티스의 '춤'이 세상에서 하나뿐이라는 것이 문제다.
그런데 대강 이런 공상을 펼치다가 그만 난제에 봉착했다. 인공지능이 렘브란트 그림의 특성을 전문가도 난처해할 만큼 유사하게 복제해 신작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이 복제가 허용되고 대량생산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제 진품의 아우라를 앞세웠던 회화도 복제의 예술이 될 수 있는가. 우린 언젠가 오즈 영화의 이미지를 소유했던 값으로 렘브란트 회화의 이미지도 소유할 수 있는 것인가. 미술관도 극장처럼, 작품과 관람 경험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반드시라기보다는 되도록 가는 곳이 되는 걸까. 혹은 집에서는 인공지능의 렘브란트 그림을 보고 가끔씩 사람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만 미술관에 가면 되는 걸까. 그때 인간의 창작행위란 어떤 가치로 분류될까.
프레드릭 와이즈먼의 다큐 '내셔널 갤러리'를 보다가 내가 저 그림을 보러 지금 저길 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불평하다가 그만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흘렀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