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인 더스트'는 걸작까진 못 되더라도 꽤 재미있는 영화다. 은행 빚 때문에 농장을 차압당할 위기에 처한 토비는 자신의 농장에 값비싼 석유가 매장되어 있음을 한 발 늦게 알게 되고, 어떻게든 빚을 갚아 농장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형 태너에게 함께 은행을 털자고 제안한다. 은행을 털어서 은행 빚을 갚기로 한 것이다. 한 노년의 경찰이 이들을 뒤쫓는다.
영화가 재미있어서 다른 이들의 의견까지 찾아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로스트 인 더스트'는 서부극이라는 데에 이견 없이 의견이 모아진다는 점이다. 필자의 경우에는 좀 다르게 느껴진 터라, 짤막한 다른 감상법 하나 정도는 추가해도 될 것 같다.
'로스트 인 더스트'를 케이퍼 무비 혹은 하이스트 필름(이른바 강탈 장르라고 지칭되는 범죄영화의 하위 장르)으로 보는 건 좀 빤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 사건이라는 면모에서 보면 '로스트 인 더스트'는 별수 없이 케이퍼 무비다. 한편, 서부극에나 등장할 법한 풍경으로서 황무지가 있지만 그 황무지 사이에 커다란 도로가 뚫려 있고 결국엔 그 도로를 자동차로 질주하다 최후를 맞는 자가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어떤 로드무비의 전형을 닮았다고도 해야 할 것 같다. 혹은 인물의 관계도라는 면에서 본다면 몇몇의 짝패를 주인공으로 하는 장르인 버디무비의 전형 안에 있기도 하다.
케이퍼 무비-로드 무비- 버디 무비를 합쳐 놓은 이 덩어리는 그럼 무엇이 될까. 평자들이 '로스트 인 더스트'와 그 유사함을 강조하며 비교하기를 즐기는 영화인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런 점에서 사실 유사함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훔친다기보다는 줍고, 길 위에서의 운명보다는 도주와 추적이라는 힘의 대결이 중요하며, 그 힘을 겨루는 이들은 무엇보다 짝패가 아니라 각자의 단독자다. 가장 중요하게는 두 영화의 정조가 다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냉혹하지만 '로스트 인 더스트'에는 묘한 향수가 있다.
강탈하고(케이퍼 무비) 질주하는(로드무비) 버디(버디무비)들의 인생막장의 몰락과 혹은 그 복원에 대한 드라마가 융성했던 시절이 미국 영화에 있었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라고 불렸던 1960년대 중후반에서 70년대 중후반에 이르는 시기의 영화들이다. '로스트 인 더스트'의 정조가 그 뉴 아메리칸 시네마 영화들에 닿아 있다고 필자는 느낀다.
그러니 이상한 우연이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는 난폭함이 무력감을 조장하던 사회의 분위기가 만들어낸 양상이거나 사조였다. 그 영화들 속에는 '로스트 인 더스트'만큼이나 박탈감과 과격함으로 허덕이는 인물들의 드라마가 즐비했고 그 때문에 인상적이기도 했다. 영화가 당대 정치사회의 경직된 분위기와 연관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로스트 인 더스트'는 오바마 시대의 금융 위기가 동기가 된 영화다. 하지만 우린 이 영화를 본 지금 다른 무엇도 본다. 난폭함을 정치적 매력으로 치장한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도 본 것이다. 이 현실정치는 또 어떤 영화의 것들을 자극할 것인가 질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