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철산군 출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6.25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오셨다. 대대로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신 할아버지는 당신도 교사가 되셨고, 전쟁이 일어났을 무렵에 갓 결혼식을 올린 상태였다. 자식들이라도 자유를 찾아 가라는 조부모님의 간곡한 권유로, 당신은 형제분들과 함께 남쪽으로 무거운 발길을 옮기셨다. 하지만 삼팔선을 넘다가 뿔뿔이 흩어져, 부모형제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아픈 세월을 이어가셨다.
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시기 위해 할아버지는 남쪽에서 군인이 되셨다. 그리고 창덕궁의 서쪽 담장을 나누어 쓰는 원서동에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모여 살았다. 막내 손자로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나는 주말이면 의례히 당신들과 함께지냈다. ‘ㄷ’자 모양의 서울식 한옥과 넓은 마당, 친근한 이웃들과 좁다란 골목길이 아파트와 달리 무척 정다웠다.
치매예방에 좋다며 종이접기를 취미로 하시던 할머니와 나는 너른 평상에 앉아 무궁화를 접곤 했다. 무궁화를 접으시는 것은 할머니의 몫이었고, 나는 붉은 단심을 그려 넣었다. 우리가 만드는 색색의 무궁화처럼 낮은 담장을 따라 백단심계, 홍단심계, 청단심계 그리고 배달계 무궁화가 무궁하게 피어났다. 두고 온 고향집의 무궁화를 잊지 못하시는 할아버지는 이웃집에도 무궁화 가지를 나누시고 동네 어귀에도 무궁화를 가꾸셨다. 약을 치면 꽃 색깔이 곱지 않다고 하시며 일일이 손으로 진딧물을 잡으시는 것이 당신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내가 과학시간에 배운 지식으로 몸에 유익한 세균인 EM용액을 이용하여 살충제를 만들어 드렸을 때, 주름진 얼굴로 환하게 웃으시던 당신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했던 효창공원으로의 여름나들이 또한 내 기억 속에 선연히 살아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간을 영원으로 살다간 애국지사들이 잠들어계신 효창공원에서 ‘나라꽃 무궁화 보급 확산 사업’의 하나인 ‘독립운동가 5인 무궁화 및 표식 제막식’이 열렸다. 행사일인 8월 29일은 백범 김구선생의 탄신일이자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멸망했던 날이라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김구선생이 승려생활을 했던 마곡사에서 가져온 김구 무궁화, 명동대성당에서 가져온 안중근 무궁화, 백정기 기념 사업회가 기증한 백정기 무궁화, 이봉창의사가 졸업한 문창보통학교 부지에서 가져온 이봉창 무궁화, 윤봉길의사 생가 터에서 가져온 윤봉길 무궁화가 식재되는 광경은 어린 내 눈에도 무척 감격스러웠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며 “꼬레아 우라!”를 외쳤던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아직도 찾지 못해 가묘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내 유해를 해방된 조국땅에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 달라!”고 하셨다는 백정기의사의 이야기를 듣자니, 괜스레 목젖이 따가워져서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평생토록 북쪽에 두고 온 고향집과 가족을 그리워하시며 매순간 통일을 염원하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당신들의 소망을 끝내 이루지 못하셨다. 육신은 남쪽에두신 채 영혼만 북쪽으로 가셨다. 3년 전에 할머니가 먼저 떠나셨고 할아버지도 곧 뒤따르셨다.
지금은 우리나라 전통음식을 연구하는 곳으로 바뀐 원서동 그 집을 생각하면 할머니의 말씀이 떠오른다. 항상 대문을 열어두고 다니시기에 내가 행여나 도둑이 들까 걱정스럽다고 했을 때, 당신이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뉘기든 궁한 이한테 뭐이든 득이 되면 되레 고맙지!”
당신들이 떠나시고 유품을 정리하러 원서동에 갔을 때, 나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담장 옆의 무궁화 가지 몇 개를 꺾어서 가져왔다.
“나라 없는 백성이랑 부모 없는 자식이 제일 불쌍한 게야!” 생전에 당신이 항상 하시던 말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