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했다. 회사에 제안은 했지만 막상 3개월만에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 정말로 가능한지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었다. 일단 큰소리는 크게 쳤다.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이 앞섰다. 그러나 곧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회사에서 최종 결정한 뒤엔 영화 연출 경험이 있는 지인들 거의 모두에게 전화를 했다. 어떻게 하면 이 프로젝트가 가능하겠느냐고, 판은 제가 벌여놓고는 남일처럼 물었다. 질문은 하나였지만 답변은 간단하지 않았다. 수년을 들여 다큐멘터리 한 편을 작업한다는 김 감독은 즉각 손사래를 쳤다. 김 감독은 자료조사에만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들인다고 했다. 물릴 수 없는 프로젝트라는 말을 그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제 말이요, 회사가 무리한 프로젝트를 그냥 냅다 맡기더라고요. 허허, 그렇게 거짓말을 둘러대 전화를 끊고 다음 날 신경성 대장염에 걸렸다. 지역에서 다큐멘터리를 수 편 만들어 연출력을 인정받은 김 감독이었다. 주변에 먼저 조언을 구한 뒤에 일을 추진했어야 했나. 좌변기에 앉아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건지 복기했지만 판세를 돌릴 수는 없었다. 일단 원하는 답변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 전화를 돌렸다. 그러다 오래 전 직장 상사로 모셨던 어느 PD 한 분께 발신인의 발신 의도를 간파당했다. “이미 취재를 마친 기획기사를 원작 삼아 만드는 영화라 하니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다소간 유보적이면서도 발신인의 심리 상태를 격려하는 의미를 담은 조언이었다. 그제서야 발신인은 좌변기에서 일어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수신인이 해 준 조언을 지나치게 제 입맛대로 해석해버렸다는 점이었다. “된다 하던데요.” 부장에게 그렇게 보고하고선 스태프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큐멘터리 영화 <청년 졸업 에세이> 제작을 시작했다.
| |  |
| 지난 5월 2일 제작회의 당시. 감독(왼쪽) 오른쪽에 앉은 김명재 촬영감독이 반쯤 졸고 있다. 이때 알아봤어야 했다. 사진 = 바림 손영훈
|
지나 생각해보니 그때까지도 마음은 반반이었다. 해내겠다는 의지로 누구보다 뜨거워서는 부서 사람 여럿을 괴롭히다가도, 화장실만 갔다 오면 내가 아닌 다른 이유로 프로젝트가 무산되기를 슬쩍 바랐다. 그러나 어려운 시국에 지역 기업들이 뜻을 모아주어 제작비까지 모이자 발신인은 강한 전방 압박에 시달렸다. 제작비가 적지 않았다. 발신인은 뒤늦은 출구 전략을 모색했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다. 선수들에게 하루 종일 공을 돌려도 책임 소재는 감독에게 있었다. 어떻게든 성과를 내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했다. 밤잠이 줄고, 가위눌린 채 잠에서 깨어나는 날이 많았다. 엄청 효자 노릇하느라고 살이 쪽쪽 빠지는 막내를 부모님께서 내내 근심하셨다.
전략이 필요했다. 짧은 기간 안에 설명이 충분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봤다. 내레이션을 쓰면 말을 구성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보다 편리하게 이야기를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내레이션을 쓰면 영화보다는 방송 다큐멘터리 성격이 짙을 것 같았고, 내레이터를 맡아 줄 1985년생 부산 출신 영화배우를 급하게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인물 인터뷰를 영화 전체에 깔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터뷰이들을 충분히 만나야 했다. 원작으로 삼은 기획기사 ‘청년 졸업 에세이 - 1985년생 김지훈·김지혜’를 출력해서는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들고 다녔다. 그 다음엔 어떤 인터뷰가 필요한지, 나열한 인터뷰 위에 어떤 내용을 덧씌울지를 결정하고 김 PD에게 인터뷰이 섭외를 주문했다. 김 PD가 섭외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기사가 제시한 담론 중 어떤 것을 먼저 보여줄지를 골라냈다. 크게 봤을 때 하나는 지역 담론, 다른 하나는 세대 담론이었다. 둘 다 영화를 관통할 핵심 키워드지만 지역 담론보다는 세대 담론에 관한 내용을 뒤쪽으로 배치하는 편이 보편적인 국내 관객들 정서를 움직이기에 좋겠다고 판단했다. 한 달 내도록 신문사 사진 데이터베이스까지 활용해 데이터 그래픽 틀을 잡고는 다시 애니메이션 구상에 매달렸다. 그렇게 세월을 다 보냈다. 첫 촬영은 스태프들이 있는 대로 조바심을 내던 5월 말이었다. 부산 영도구, 그중에서도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청년을 가장 많이 잃었다는 봉래2동에서부터 영화를 시작했다.
| |  |
| 대학 1학년 때 어느 교수님 한 분이 “다섯 편까지는 찍어 봐야 자기 재능을 알 수 있다” 하셨으므로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감독(왼쪽) 너머 근로시간 준수를 요구하며 삭발한 김찬우 PD. 김명재 촬영감독의 표정도 썩 좋지 않다. 사진 = 바림 손영훈
|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는 동안 단편영화를 모두 다섯 편 찍었지만 잘해야 ‘A+’를 받았을 뿐 영화제 등에서 뚜렷한 성과를 낸 작품은 없었다. 아버지께서 아버지를 연기해주셨던 첫 작품부터, 동반 입대했던 친구가 전역하기를 기다려 찍기 시작한 이른바 ‘행복 3부작’. 그 중 친구가 단독 연출한 한 편을 뺀 두 편과 단편 다큐멘터리 한 편, 그리고 2017년 대학 동기 집을 통째로 빌려 배우와 먹고 자며 촬영한 작품까지. 매 작품 열과 성을 다했으나 다섯 편 모두 술자리에서 추억을 소환할 때만 특별히 언급됐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대학 1학년 때 어느 교수님 한 분이 “다섯 편까지는 찍어 봐야 자기 재능을 알 수 있다” 하셨으므로. 다섯 편을 특별히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다며 스스로 위안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다섯 편을 찍고도 거둔 성과가 없으면 그만하라 하셨으므로. 물론 <청년 졸업 에세이>가 여섯 번째 작품이라는 점을 회사에 따로 말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여섯 번은, 절대 하지 말라고 했었다.신동욱 기자 woogy0213@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