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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의 부산 가요 이야기 <12> ‘용두산 엘레지’사연과 창법

용두산 한 계단 두 계단 … 음 높낮이로 힘겨운 피란의 삶 묘사

  • 이동순 시인
  •  |   입력 : 2020-11-08 19:46:00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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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신사 자리했었던 용두산
- 해방 후 그 자리에 판자촌 생겨
- 먹고 살기 힘들었던 정착민들
- 매일 194계단 오르내리며 생활

- 가사에 계단의 상승·하강 반영
- 실제로 힘겹게 오르는 느낌 줘
- 현실 극복해 삶 회복되길 바라는
- 작곡가의 따뜻한 마음 담겨있어

- 나훈아 주현미 송가인 리바이벌
- 원곡자인 고봉산 절창 못 따라가

대중가요 노랫말에는 계단이 소재로 들어간 작품이 적지 않다. ‘경상도 아가씨’ ‘추억의 사십계단’ ‘구름계단’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 ‘천국의 계단’ ‘당신의 계단’ ‘내일로 가는 계단’ ‘하늘 계단’ 등등. 왜 이렇게 계단을 테마로 한 노래가 많은 것일까? 인간의 마음에서 현실은 늘 고통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실패, 좌절, 가난, 정체, 억압, 갈등, 차별, 실연, 질병, 폐쇄, 소외, 감금 따위에 시달리며 시련을 겪는데 누구나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일탈의 갈망과 욕구충동을 지니고 있다.

계단이 머금고 있는 도구의 원리는 상승과 하강이다. 이미 가 닿은 곳이 심리적 충족을 주지 못할 때 인간은 그곳을 벗어나려 한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는 죽어서야 나올 수 있는 악명 높은 교도소 벽을 뚫고 아슬아슬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마침내 자유의 공간으로 탈출한다. 그러므로 계단의 상징성은 보다 나은 곳으로 이동하려는 갈망의 도구이다. 계단 저쪽은 피안의 상징적 장소이다.

1950년대 초반 항도 부산으로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던 피란민들에게 부산은 삶의 마지막 끈이었다. 절박한 생존의 최후 몸부림이자 발버둥이 펼쳐졌던 공간이다. 그런 갈망 속에서 사십계단이 등장하는 ‘경상도 아가씨’ ‘추억의 사십계단’ 같은 노래가 나왔고, 194개의 계단이 있는 ‘용두산 엘레지’ 노래도 나왔다. 계단들을 오르내리며 결코 이대로 자신의 삶이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다짐을 수백 번도 했으리라.
1954년 봄 6·25 전쟁이 끝난 뒤에 피란민이 지은 판잣집이 빼곡하게 들어선 부산 중구 용두산과 그 일대를 부산항 쪽에서 담은 사진. 국제신문 DB
■일본신사 철거된 용두산에 판잣집 다닥다닥

용두산의 역사는 조선 숙종 때로 거슬러 오른다. 조선을 내 집처럼 드나들던 일본인 무역상들의 숙소가 있었고, 개항 이후에는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분위기는 식민지시대에도 이어졌다. 용두산에는 일본신사가 설치되고 부산거주 일본인들은 그곳을 성지처럼 여기며 참배했다. 문화인류학자 김열규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부산의 전차가 용두산 앞쪽을 지날 때 차장은 ‘신사 앞!’이라고 외쳤다. 그러면 승객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그 방향으로 허리 굽혀 절을 했다고 한다. 8·15 해방 이후 신사는 철거됐지만 6·25 전쟁의 격동 속에서 주변 산기슭에는 피란민의 판잣집이 다닥다닥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매일 사십계단과 용두산의 194계단을 오르내리며 고달픈 피란살이를 견뎠던 것이다.

노래 ‘용두산 엘레지’ 가사는 겉으론 사랑과 이별, 그리움을 담고 있지만 실제로는 부산 피란시절의 쓰라린 고통과 상처, 눈물과 한숨 등 생활사의 반영이 짙게 담겨 있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그리운 용두산아/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이냐/ 둘이서 거닐던 일백구십사 계단에/ 즐거웠던 그 시절은 그 어디로 가 버렸나/ 잘 있거라 나는 간다 꽃피던 용두산/ 아 용두산 엘레지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 말자/ 한 발 올려 맹세하고 두 발 디뎌 언약하던/ 한 계단 두 계단 일백구십사 계단에/ 사랑 심어 다져 놓은 그 사람은 어데 갔나/ 나만 혼자 쓸쓸히도 그 시절 못 잊어/ 아 못 잊어 운다



노랫말은 사랑의 애달픈 추억과 회고로 구성된 2절 형식이다. 그런데 악곡의 특성을 가만히 음미해 보노라면 노래의 흐름에는 상승과 하강의 계단원리가 조직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고음으로 시작되는 서두는 계단의 정점, 즉 꼭대기이다. 그것은 고통의 절정에서 허덕이는 시적 주체자를 상징한다. ‘한 계단 두 계단’이란 대목에서는 가창자들이 실제로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실감을 환기시켜준다. 절규와 탄식, 긴장과 이완의 분위기를 적절한 균형으로 배분하고 있다. 작곡가의 이런 의도 속에는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여 삶의 평정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따뜻한 충심이 들어있다.

■여러 가수 리바이벌… 절창은 원곡 가수

고봉산의 독집 LP앨범, 용두산 엘레지.
작사가 최치수는 열차승무원 경력을 지녔고 아세아레코드사 설립자이다. 대구 아세아극장 대표이기도 했다. 작곡과 가창을 맡은 고봉산은 1924년 황해도 안악 출생으로 본명은 김민우이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작사, 작곡, 편곡, 가창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다. 1950년대 여러 악극단 무대에 출연했고 특히 박단마 악단에서 많이 활동했다. 그 인연으로 한때 가수 박단마의 매니저로 일하기도 했다. 노래 ‘울어라 기타줄’이 원래 고봉산의 취입 예정곡이었으나 무슨 까닭인지 손인호에게 돌아갔다. 이 충격으로 크게 상심했지만 더욱 자신의 기량을 갈고 닦아 ‘용두산 엘레지’ 같은 절창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고봉산의 대표곡으로는 ‘아메리카 마도로스’ ‘이별의 대구정거장’ ‘철새’ ‘바람 따라 세월 따라’ ‘잘 했군 잘 했어’ 등이 있다. 일본 가요계에도 진출하여 오가와 에이사쿠가 부른 엔카 ‘뒷골목 가을비(裏町しぐれ, 우라마치 시구레)’를 발표하기도 했다.

‘용두산 엘레지’는 고봉산 원곡 이외에도 나훈아, 주현미, 송가인 등 여러 가수가 부른 리바이벌 버전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가창을 두루 들어봐도 고봉산 원창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내는 가수가 없다. 지나친 오버액션에 의존하거나 단조로운 감정과잉으로 듣기에 거북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곡가 이호섭은 노래를 변화된 시대에 맞게 불러야 한다며 부적절한 감정과잉을 자꾸 부추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이 노래를 부르는 고봉산 창법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섬세함, 애절함, 절규, 현실로 복귀하려는 평상심의 회복 따위가 각 장절마다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절묘하게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구 내지른다고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님을 고봉산의 창법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용두산 주변의 게딱지같은 피란민 판자촌은 1954년 화재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불탄 자리에 공원이 조성돼 시민의 휴식공간이 되었지만 이름은 우남공원으로 바뀌었다. 자유당 독재시절 충성파들의 농간에 따른 결과였다. 우남(雩南)은 독재자 이승만의 아호였다. 4·19민주혁명 이후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용두산공원의 이름은 복원되었다. 한 장소가 겪은 역사의 영욕과 사연을 노래 한 곡으로 모두 되새겨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시인·가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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