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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익진의 무비셰프 <10> 이자벨 아자니

  • 국제신문
  •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
  •  |  입력 : 2021-03-06 08:3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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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익진의 무비셰프 <10> 광기·사랑·열정의 프랑스 국민 배우, 이자벨 아자니

새삼 이자벨 아자니(1955년생)가 생각났다.

영화 ‘여왕 마고’(1994)나 ‘카미유 클로델’(1988)에서 봤던 그녀의 강렬한 이미지가 몇십 년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핏빛 광기,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열정, 결코 나이 들지 않는 동안의 외모, 노래 ‘오하이오’를 부를 때의 맑고 깜찍한 목소리 등이 그녀의 이미지들이다. ‘책받침 여왕’ 소피 마르소(1966년생)와 나이가 어떻게 되나 했는데 이자벨 아자니가 11년 위다.
영화 ‘여왕 마고’ 속 이자벨 아자니(맨앞)의 눈빛은 세상을 압도해버릴 것만 같다. 공기의 흐름마저 비틀어버릴 듯한 눈빛이다.
나이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들 여배우를 본 지가 매우 오래되어 지금은 어느 정도 늙었을까 궁금하기도 해서였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다. 소피 마르소의 영화들은 그간 가끔은 눈에 띄었지만, 이자벨 아자니의 영화는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은 작품이 많은 모양이다 짐작만 했다. 이자벨의 영화 중 국내에 개봉되지 않은 게 꽤 있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조각 같은 외모’를 뛰어넘는 이자벨 아자니는 그 완벽한 미모와 신비로울 정도로 열연하는 폭발적인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히 과소평가받고 있는 배우다. 이자벨 아자니는 대중적으로 큰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영화들보다는 자신의 연기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영화들에 주로 출연했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아름다웠던 20대 때 이자벨 아자니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살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적인 영화들에 출연했다.” (조인스닷컴 ‘조원희의 아이러브 무비’ 2010년 8월 30일 자에서 인용)

소피 마르소가 당분의 순도가 아주 높은 영화들에 출현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폭발하고 책받침 여왕의 완결을 이룬 반면, 이자벨 아자니는 자기 영화들에서 전혀 달콤하지 않은, 광기 어린 사이코 같은 역할을 많이 했기에 책받침 여왕 순위에서 밀려난 것이리라. 또한 당시 우리나라에 상영되기에는 너무 센(?) 영화들에 출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그녀가 칸 여우주연상과 세자르 여우주연상을 받은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의 ‘포제션’(1981)은 비디오와 DVD로만 출시되었을 뿐 국내에 개봉되지 못했다. 영화 ‘포제션’이 어떤 이미지인지 궁금해 몇 개 트레일러를 찾아보았다. 컬트영화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지하철의 복도(지하철 빙의 장면)에서 아무런 대사 없이 거의 미치광이가 되어간 장면인데 진짜 미친 사람보다 더 미친 사람 같았다.

영화 ‘포제션’에서 이자벨 아자니는 놀라운 몰입, 극한의 광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로 이자벨은 깊은 인상을 영화계에 새긴다.
벽에 몸을 부딪치고, 바닥에 누워 떼굴떼굴 구르고, 덜덜덜 떨고 토하고 피 흘리고, 생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몸 안에 무슨 괴물이라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몸동작과 함께 고래고래 비명 지르는 바람에 혼이 나갈 지경의 연기를 보여준다. 일설에 따르면 이자벨 아자니는 정신병원에서 얼마 동안 치료를 받았고, 아직도 그녀에게 이 영화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것은 실례라고 한다.

이 영화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배우가 출현했는데 ‘쥐라기 공원’ 시리즈(1993~)’의 주인공 샘 닐(1947년생)이다. 곱상한 학자풍 스타일로만 여겼는데, 이 영화에서 뜻밖의 이미지를 선보여 신선했다. 그는 최근 넷플릭스 영국 드라마(영드) ‘피키 블라인더스’에 출연해 중후한 악당 역할(타락한 형사)을 아주 잘해냈다.



이런 영화 말고도 이자벨 아자니가 특징을 발휘한 영화는 많다. ‘카미유 클로델’, 이 한 편 영화만으로도 그녀의 예술적인 광기와 성난 불길처럼 타들어 가는 사랑의 열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는 카미유 클로델과 위대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불꽃 튀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은 프랑스의 조각가이다. 저명한 시인이자 외교관인 폴 클로델의 누님이시다. 1884년께 로댕의 아틀리에에서 조수로 일하고 조각도 배운다. 로댕과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결국, 카미유는 로댕과 결별하고 독립해 조각을 하다 동생 폴(나쁜 동생?)에 의해 30년간 정신병원에 갇혀 살다 사망했다.



이 영화의 포인트는 카미유를 다룬 어느 작품보다도 카미유 클로델을 매혹적으로 돋보이게 한 점이다. 상대적으로 로댕은 권위적이고 세속적 야심에 찬 좀 얍삽한 예술가로 표현했다(로댕에 대한 선입견을 깬다). 뉘탱 감독은 클로델의 신비한 영혼의 비밀을 깊이 다루기 위해 이자벨 아자니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바로 광기다.
이자벨 아자니가 영화 ‘카미유 클로델’에서 카미유 클로델을 연기하며 조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매우 인상 깊은 장면으로 꼽힌다.
예술에 대한 광기와 사랑에 대한 광기다. 실제 카미유 클로델의 조각(그녀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시기를!)을 보면 많이 놀란다. 우아하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터치가 느껴져 아무 형태도 아닌 돌이 생명력으로 가득 차 꿈틀거린다(사쿤탈라, 영원한 우상, 왈츠(작곡가 드뷔시에게 헌정) 등등). 무엇보다도 숭고하고 아름답다. 카미유가 콜로라시 아카데미에 입학해 조각을 본격적으로 배울 때 이 학교 교장은 로댕과 유사한 점을 언급하며 ‘혹시 로댕에게서 조각 배운 적이 있는감?’ 물었다. 카미유는 로댕이 누군지 생판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상태였다.

이를 계기로 카미유는 로댕에게 호기심을 갖게 된다. 이 호기심이 결국 카미유를 죽을 때까지 불행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19살 카미유와 43살 로댕의 만남이 성사된다. 만약 로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로댕보다 위대한 조각가가 될 수 있었을 거란 게 내 생각.

로댕은 대가답게 카미유의 천재적 재능을 첫눈에 알아봤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한다. 하지만 그에겐 이미 20년 전, 그가 무명일 때부터 지원해주고 돌봐준 연상의 여인 로즈 뵈레가 있었다. 사실혼 관계였고, 더구나 둘 사이에는 카미유보다 두 살 어린 아들이 있었다.

그런 로댕 자신도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타올라 아무리 억눌러도 억누를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그대는 나에게 활활 타오르는 기쁨을 준다오. 내 인생이 구렁텅이로 빠질지라도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슬픈 종말조차 내게는 후회스럽지 않아요. 당신의 그 손을 나의 얼굴에 놓아주오. 나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나의 가슴이 신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내가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몽롱하게 취한 상태에 있다오.” -로댕의 편지

카미유로서는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술은 깨기 마련이고 사랑도 차갑게 식어버린다는 진리, 타인에게는 불 보듯 훤히 보이는 결말이 사랑에 빠진 남녀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굳이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영화 ‘카미유 클로델’에서 이자벨 아자니의 가장 인상 깊은 연기는 카미유가 조각 작업을 하는 장면이다. 진흙 덩이를 사랑하는 연인처럼 끌어안고 온몸으로 거칠게 애무하면서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는 예술가의 간절하고 절실한 손길이 느껴져 감동적이었다.

이자벨 야스미나 아자니 (Isabelle Yasmina Adjani)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파리로 이민한 알제리인 아버지 모하메드 체리프 아자니와 독일인 어머니 엠마 아우구스타 슈바인버거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초등학생 시절 12살 때부터 아마추어 연극무대에 섰고, 14살 때부터 아역으로 영화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연극배우로 활동하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에게 발탁되어 앞으로 언급할 영화 ‘아델 H 이야기’(1975) 주연을 맡은 것이 계기가 돼 배우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아자니는 파리 제8대학교 (벵센-생드니 대학)을 졸업했다는데 이 대학이 굉장하다. 68 혁명 이후 대학교에 대한 새로운 법안이 제정되면서 정식 대학으로 승격됐다. 당시 실험대학 개교에는 당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엘렌 식수 등이 개입하였다. 개교에 관여한 인사들이 메가톤급 진보 논객들이어서 그런지 아자니도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강하다. 지금도 파리 제8대학은 파리 평준화 대학 중 가장 진보적인 노선을 걷는 대학으로 꼽힌다.

중점 학문은 철학과 사회학, 예술학이다. 이 대학 철학과를 나온 슬라보예 지젝과 다수 문학인을 배출했고 알랭 바디우(모로코 출신, 반플라톤 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응하는 신플라톤주의와 합리주의의 수호자) 등도 8대학 간판스타로 활약했다니 수준급 대학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아자니는 17세였던 1972년 프랑스의 국립극단인 코메디 프랑세즈에 입단해 몰리에르의 희곡 ‘아내들의 학교’의 여주인공 아네스 역할 등으로 평단 안팎의 극찬을 끌어냈다. “대리석처럼 매끄럽고 흰 피부”에 짙은 갈색 머리카락과 짙은 푸른색 눈을 가졌다. 연극배우 시절부터 이미 그리스 신화의 님프님께서 환생한 듯 투명하고 비현실적인 미모로 유명했다.

영화 ‘아델 H의 이야기’(1975년)는 프랑스의 누벨바그 거장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 영화이고, 주인공 아델 역을 맡은 20대의 이자벨 아자니는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세기 버전 여성 스토커 이야기라고 소개되는 이 영화는 실화가 바탕이다. 영화는 ‘레미제라블’로 잘 알려진 프랑스 문학계 최고 윗자리에 빛나는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둘째 딸인 아델 위고에 대한 이야기다.

H는 위고의 첫 글자에서 딴 것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정치가였던 빅토르 위고에게 이 같은 비극적인 가족사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큰딸은 익사사고로 숨지고, 영화 ‘아델 H의 이야기’ 주인공인 둘째 딸 아델은 장교 핀슨를 사랑하다가 폐인이 돼 미쳐버린다는 것이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 하나 없는 고립 상황 속에서 아델의 심신은 피폐해진다. 밤에는 물에 빠져 죽은 언니에 대한 악몽에 시달리고, 낮에는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여관방에 틀어박혀 글을 썼다. 이 모습은 카미유 클로델이 강물이 스며들어오는 형편없는 지하작업실에서 힘들게 조각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아델은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이자벨 아자니.
“사랑의 달콤함을 맛볼 수 없다면, 그 쓴맛에 나를 바치겠다.” “사랑은 나의 신앙이다.”

폐인이 되어 정처 없이 떠도는 아델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글쎄, 이 장면은 안타까움을 넘어 허무하기까지 하다. 광기의 끝에 다다른 그녀의 눈동자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여기 빅토르 위고가 쓴 시가 있다. 마치 사랑으로 인한 딸의 파멸을 예견한 것 같아 주술적인 느낌마저 든다. 비록 그 사랑이 파탄의 극한으로까지 치달았다 해도 아델의 광기는 어찌 보면 차라리 거룩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일은 새벽부터’라는 시다.

내일은 새벽부터 들이 훤해지면

난 떠날 테다. 난 안다, 네가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가련다, 숲을 지나 산을 넘어.

이 이상 더 너와 멀리 떠나 있을 수가 없구나.

나는 걸을 테다, 나의 눈은 오로지 한 생각에 골똘하여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아무것도 없을 게다

홀로, 낯선 나그네, 굽은 등에 두 손을 맞잡고

슬픈 나에겐 대낮도 밤과 같으리라.

나는 저무는 석양 녘의 황금빛도

멀리 아르플뢰르 항구를 향해 내려가는 돛단배들도 보지 않으련다.

다만 너 있는 곳에 다다르면 네 무덤 위에

푸른 호랑가시나무와 꽃 핀 히드 다발을 놓으리라.

사랑에 실패하고 요양원에서 여생 40년을 지내야만 했던 아델 위고도 마치 카미유 클로델이 로댕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다가 정신병원에서 30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또 하나 아이러니가 있다. 아자니는 ‘정익진의 무비셰프’ 제3회에서 다룬 영국 배우 다니엘 데이루이스와 6년간 열정적으로 사귀었다. 그런데 데이루이스는 아자니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줄리아 로버츠와 불륜에 빠진 끝에 달랑 팩스 한 장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하니 아자니가 연기했던 영화 속 주인공들과 너무나 흡사한 인생이 아닌가.

영화 ‘여왕 마고’(1994)는 프랑스 궁정 막장 드라마. 구교도와 신교도 간 종교 갈등에서 빚어진 형제간 암투와 암살, 학살, 참수, 근친상간 등등으로 핏빛이 난무한다. 프랑스의 간판급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다니엘 오떼유, 장 위그 앙글라드, 벵상 뻬레, 이자벨 아자니의 열연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여왕 마고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 왕후 역을 맡은 비르나 리지(이탈리아 배우)가 돋보였다. 권력에 영혼을 파는 사악함이 가득한 연기가 압도적이었다. 오래전 봤을 때는 이 배우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보니 게오르규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25시’(1967년)에서 남자주인공 요한 모리츠(앤서니 퀸)의 아내 수잔나 모리츠 역을 했던 비르나리지다.

아무튼 마고 역으로 열연한 이자벨 아자니의 연기력은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자벨 아자니는 프랑스 최고 배우임을 이 영화에서 여실히 입증했다.



추신 : 프랑스 국민 배우인데도,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인의 피는 전혀 섞여 있지 않은 이자벨 아자니, 오히려 프랑스와 역사적으로 껄끄러운 나라들 혈통을 물려받았다. 아자니는 프랑스 국적 외국인 혈통 유명인 중 알제리의 카빌리 출신 축구 영웅 지네딘 지단과 함께 가장 정치적으로 주목받는 인물이다.

이런 태생 배경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진보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인종차별이나 이민 문제와 관련해서도 부당한 대우를 받는 알제리계 이민 편에 서서 ‘국민전선(프랑스 제3당, 이민자 유입 반대, 유럽연합으로 부터 독립 주장 등등)’ 같은 극우 백인 우월주의 단체와 날카로운 대응을 주고받는다. 특히 알제리계 이민이 살해당한 인종차별 사건에 분노해 자신의 아버지가 알제리 이민이라는 사실을 공표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일 때문인지 꽤나 자주 프랑스 극우파 정치인들과 대립각을 세운다.시인 ij07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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