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를 열었던 흑백 드라마 ‘달동네’. 다른 드라마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달동네’만큼은 화면을 꽉 채우던 배우들 모습이 액자 속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연극배우였던 추송웅과 그 딸로 나온 똑순이 김민희의 부녀 연기는 찰떡궁합이었고 담벼락에 기대 고물 라디오를 틀어대며 장미희를 짝사랑하던 김인문의 처량한 연기도 일품이었다. “똑순이하고 아배하고 손잡고…” 사투리 시리즈는 귓가에 생생한데, 마치 화면을 뚫고 나올 것 같았던 똑순이의 찰진 연기를 보며 동년배가 주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나 보다.
이 드라마에는 다섯 가족이 나오는데 이낙훈 노주현 장미희 이미숙 연규진 김인문 선우용녀 김을동 차화연 등 초호화 캐스팅이었고 ‘용의 눈물’ ‘여인천하’를 연출한 고(故) 김재형 PD와 연속극의 대가 나연숙 작가가 합심해 만든 작품이다. 방앗간, 이발소, 월부책 장사, 목욕탕 때밀이 등 무려 15개 직업군이 나왔고 10쌍 커플이 알콩달콩 이야기를 펼쳤으며 시청률은 50%를 훌쩍 넘기기도 했다. 1980년 10월, 신군부가 집권하자마자 시작된 ‘달동네’는 서민 모습을 통해 ‘정겹고 훈훈한 가족’의 이데올로기를 꾸준히 주입하고 저항성을 순화하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80년대 서울에 많은 달동네가 있었다. 버스 타고 성수대교를 건너면 왕십리 근처에 큰 채석장이 있었는데 그 위 산 중턱쯤에 빼곡히 달동네가 있었다. 시골서 상경해 왕십리에 정착한 고모 집에 놀러 가면 그 채석장이 놀이터였다. 구슬치기, 딱지놀이, 고무줄놀이를 하던 우리 아지트였다. 해 질 때까지 뛰어노는 게 행복했던 시절이다.
똑순이 나이에 잠시 외할머니와 살게 된 그 시절, 저녁에 할머니가 된장찌개 끓이던 소리, 생선 굽던 자욱한 연기, 8시30분쯤 흘러나오던 ‘달동네’ 주제가는 ASMR(마음을 편하게 하고 쾌감을 주는 좋은 소리·영상)처럼 달팽이관에 각인돼 있다. ‘달동네’는 삶의 소소한 재미와 ‘인생 별거 있나, 내 옆에서 항상 내 편 들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되지’ 하는 최고 메시지를 전한 드라마가 아니었나 한다. 그렇게 이 드라마는 할머니 집에서 언젠가 데리러 올 엄마를 기다리며 TV 보다 잠들던 여덟 살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경성대 글로컬문화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