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70년사에서 멜로 드라마 양대 산맥을 꼽자면 김수현 작가와 홍승연 작가를 들 수 있다. 김수현 작가가 대가족 관계에서 오는 대비된 상황을 통해 멜로극 틀을 짰다면, 홍승연 작가는 좀 더 통속적으로 당시 시대상을 적절히 활용했는데, 1980년대 중견 기업을 일군 건설회사나 패션회사 사장, 졸부가 된 집의 안주인, 가난한 여대생을 등장시키며 애정·욕망의 삼각관계를 그려냈다. 광고·패션 등 세련된 직업군 묘사는 88올림픽을 치러낸 한국사회가 거대한 돈의 맛에 빠져드는 과정에서 몰락하는 인간군상 모습을 보여줬다.
홍 작가는 주인공의 행동을 통한 심리묘사에 탁월했는데, 청춘 스타를 기용해 이슈를 만들기로 유명했다. MBC ‘첫사랑’에서 황신혜 김주승이 스타덤에 올랐고 ‘사랑의 굴레’(1989)에서는 에로 배우로 각인돼 있던 임성민(1995년 작고)을 연기도 잘하는 배우로 띄웠다. 고두심은 성공한 사업가 남편(노주현)을 의심하는, 경계성 인격장애와 의부증을 가진 안주인으로 나오는데 그의 히스테릭한 연기가 큰 인기였다.
사사건건 자신을 무시하는 남편을 ‘디스’하던 고두심의 대사 “잘났어 정말~”은 코미디 단골 소재가 됐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얄미운 상대에게 써 먹는 국민 유행어였다. 그동안 ‘전원일기’에서 큰 존재감 없이 고분고분한 맏며느리 역할을 하던 고두심을 재발견하게 했고, 고두심은 악역이지만 동정심을 유발하는 연기로 그해 KBS 연기대상을 받았다.
‘사랑의 굴레’에서 까탈스럽고 불안한 고두심을 치료하던 주치의가 영화 ‘미나리’의 스타 윤여정이었다. 미국에서 귀국해 멜로 드라마 조연으로 연기 활동을 재개한 윤여정의 감초 연기를 볼 수 있는데, KBS는 복고 열풍이 불자 자체 유튜브 계정 ‘옛날 티비’를 개설해 ‘사랑의 굴레’ 영상을 제공하고 있다.
자료 검색을 하다가 홍승연 작가가 올해 3월 작고한 사실을 알았다. 명복을 빈다. ‘첫사랑’ ‘사랑의 굴레’ ‘두려움 없는 사랑’까지, 통속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는 한국 멜로 드라마의 여정을 개척했다. 오늘날 K-드라마가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는 데는 앞서 간 작가들의 창작이 거름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경성대 글로컬문화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