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곡이었던 ‘돌아와요 충무항에’
- 1972년 제목 바꿔 조용필 녹음
- 세련미 떨어져 인기 얻는 데 실패
- 창법 등 보강해 4년 뒤 새 앨범
- 완결미와 호소력으로 인기 폭발
- 80년 버전 편곡 앨범은 결정판
- 일본·대만서 번안곡 나오며 유행
- 부산의 위상 높이는 데 크게 공헌
우리에게 너무 친숙한 노래는 그 전승의 위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너무도 익숙해서 대충 가볍게 보아 넘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래 하나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히트를 하게 되면 그 노래 덕분에 엄청난 후속 효과가 줄기차게 이어진다. 오늘날 부산의 위상이 가히 세계적 도시로 발돋움하게 된 것도 여러 공로의 주체가 있겠지만 우리는 상상을 뛰어넘는 막강한 파워로 계속 부산의 광채를 더해주는 노래 한 곡을 먼저 떠올릴 수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돌아와요 부산항에’(황선우 작사· 작곡, 조용필 노래, 197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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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전의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을 부른 가왕 조용필(왼쪽)과 부산 해운대 송림공원 부근에 있는 노래비. 국제신문DB |
■‘돌아와요 부산항에’ 원곡 있었다
오늘은 이 노래의 출현부터 크게 히트하기까지 어떤 과정과 곡절을 거쳤는지, 그리고 이 작품이 부산에 기여한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더듬어보기로 한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곡은 ‘돌아와요 충무항에’(김성술 작사·황선우 작곡·김해일 노래·1970)이다. 작사가 김성술과 가수 김해일은 동일인물이다. 원곡을 들어보면 통영의 여러 명소, 이를테면 미륵산 충무항 세병관 한산도 등이 중심배경으로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느린 템포와 길게 늘어지는 창법이 대중들의 취향과 기호에서 일단 비켜나 있다. 여기에다 김성술이 1971년 군복무 중 휴가 나왔다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이 곡은 덧없는 망각으로 묻혔다.
하지만 곡조에 대한 미련이 여전히 남았던 작곡가 황선우는 1972년 이 작품의 제목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꾸고 조용필에게 취입을 시킨다. 그러나 대중의 반응을 즉각 얻어내지 못했다. 당시 작품을 유심히 들어보면 히트 이후의 작품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긴장이 풀려있을 뿐만 아니라 이완된 리듬이 별반 호감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창법의 매끈한 느낌도 부족하고 발음도 불분명하며 세련미도 현저히 떨어진다. 대중예술가에게 이런 냉철한 자기반성은 늘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악곡을 완전한 수준에 도달시키려는 가수와 작곡가의 강렬한 의지는 이 미흡함에서 새로이 불타오르게 된다. 1976년 가수 조용필은 피나는 연습 끝에 드디어 자기만의 고유성이 느껴지는 창법으로 편곡을 거쳐 독집앨범을 내게 되는데 이 작품은 출시되자마자 가요팬들의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각 소절마다 깔끔하게 매듭이 지어지는 창법의 완결미가 한층 보강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사가 흥건히 머금고 있는 호소력을 충분히 소화시켜내고 있다.
■연구와 노력을 거듭해 탄생한 명곡
가요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작품의 중심화자가 슬그머니 자신으로 바뀌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조용필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편곡을 거듭하여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1980년 버전을 발표한다. 이 시기의 노래에는 온몸으로 흐느끼는 듯, 혹은 절규하는 듯한 수리성과 탁음효과를 적절히 구사하는 국악창법이 느껴진다. 말하자면 충분히 발효되고 숙성된 성음과 창법으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조용필 고유의 독자성을 성취한 것이다. 무대에서 이 노래의 결정판을 열창하는 조용필에게 대중들은 크게 환호하며 감동의 도가니에 빠졌다. ‘가왕(歌王)’이란 호칭은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붙여졌다. 그러니까 가수 조용필과 작곡가 황선우는 1972년 이후 무려 8년 동안이나 이 노래의 진정한 완성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쏟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전반적 경과는 마치 지난 1936년에 발표된 ‘눈물의 해협’(김상화 작사, 박시춘 작곡, 강문수 노래)이 ‘애수의 소야곡’(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으로 거듭나는 악전고투의 과정과 비교가 되는 흥미로운 사례다. 이 가요작품도 ‘애수의 소야곡’처럼 같은 악곡, 동일한 가수의 노래이지만 노랫말만 바꾸어서 히트곡에 도달한 드문 경우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1980년 무렵에 이르러 완전한 수준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노래는 1979년 재일동포 모국방문행사와 맞물려 그 배경음악으로 대단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흐느끼는 듯 한이 맺힌 듯, 잔잔히 울려 퍼지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곡조는 많은 사람을 눈물로 흥건히 젖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작사 작곡 가창의 조화가 워낙 완벽했기 때문에 이 노래는 자연스럽게 해외로 확산되는 전파(傳播)의 경로를 타게 되었다. 현해탄 건너 일본 엔카 무대에서는 한국의 트로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그들 정서에 맞도록 개사하여 여러 가수들이 번갈아가며 취입 발표했다. 그 번안 내용은 돌아오지 않는 남성을 항구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성화법으로 구성되었다.
■일본·대만서도 번안곡 널리 불려
일본 최초의 발표곡은 도노사마킹스가 불렀는데 1979년 ‘눈물의 부두’란 타이틀로 무대에 올렸다. 이어서 1983년 아츠미 지로가 ‘부산항으로 돌아와요’란 번안곡을 불러 엄청난 음반판매고를 올렸다. 이후 일본 엔카를 대표하는 가수 미소라 히바리, 야시로 아키, 모리 마사코, 시마즈 아야, 타이완 가수 덩리쥔(鄧麗君) 쑨칭(孫情) 일본무대에서 활동하던 이성애, 계은숙, 김연자 등 여러 가수들이 이 곡의 번안 작품을 불렀다. 세계적인 연주가 폴 모리아가 지휘하는 그랜드오케스트라가 이 노래를 편곡해서 ‘Please Return to Pusan Port’란 타이틀로 무대에 올려 큰 갈채를 받았다. 이쯤 되면 이 노래를 ‘글로벌 송’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악곡의 명성을 한층 드높인 계기는 프로야구 KBO 리그구단 롯데자이언츠 경기 때 자이언트 지지 팬들의 대규모 합창과 환호도 한몫을 했다. 이후 이 노래는 ‘부산 갈매기’(문성재)와 더불어 부산을 상징하는 주제가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톡톡히 다하였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가고파 목이 메여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혀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1980 버전) 전문
조용한 날 부산항에 나가서 바다를 향해 이 노래 가사를 음미하며 잔잔히 불러보시기 바란다.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지나간 시절 우리 한국인들이 어떻게 해서 현해탄을 건너게 되었고, 또 그들이 일본이나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어떤 고통과 번민의 삶을 살았는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비 오는 날, 만리타국의 허허벌판을 울면서 헤매 다닐 그 원혼들의 흐느낌도 듣게 되리라. 노래 한 곡이 이처럼 부산을 빛나게 했다. 참으로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인·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