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래부사 지낸 선비·문인·관료
- 통신사 경험 쓴 ‘해사일기’ 보니
- 日을 편견없이 그대로 보려했고
- 외교관으로서 본분도 잃지않아
- 백성 위해 고구마 들여오는 안목
- 이순신과 비견할 인품·능력 갖춰
- 위기의 시대 재발견돼야할 인물
원칙을 잡았다. “이번 취재와 관련해 1) 편집국 바깥으로 안 나간다 2) 사람을 안 만난다.” 부산 코로나19 확산세가 무섭기에 취한 방역 강화 조처였다. ‘나가지 않고 만나지 않고’ 문화 동행을 어떻게 쓸까?
| |  |
| 부산 영도구 청학동에 세운 ‘조내기 고구마를 짊어진 농부’ 조형물. 1763년부터 이듬해까지 조선통신사를 이끌고 일본에 다녀온 조엄 선생이 쓰시마에서 접한 고구마를 부산으로 보내 이곳 영도에서 처음 기른 인연을 보여준다. 사진 왼쪽은 영도의 또 다른 상징인 절영마 조형물이다. |
조엄(1719~1777) 선생을 ‘해사일기(海槎日記)’(조엄 지음· 박진형 김태주 옮김·논형·2018)로 만나기로 했다. 조엄은 1763년(영조 39) 부제학으로 일할 때 통신사(通信使) 정사(正使)로 임명돼 같은 해 8월 3일~이듬해 7월 8일 일본에 다녀왔다. ‘해사일기’는 통신사 정사로서 조엄이 쓴 일기 4권이다. 사(槎)의 뜻은 나뭇가지, 그루터기, 고대에 남만(南蠻)을 일컫던 칭호, 뗏목으로 나온다. 槎를 뗏목으로 풀지 남만으로 풀지 혼자 궁리해서는 잘 알 수 없다.
“난세에는 이순신! 치세(治世)에는 조엄!” ‘해사일기’를 읽고 내린 결론이다. 장군 이순신과 선비 조엄의 그릇과 역량은 들여다볼수록 막상막하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해사일기’와 ‘난중일기’에 나타난 조엄과 이순신의 인품·능력에는 공통점이 많다. 그리고 부산은 조엄 선생을 더 잘 기리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엄은 부산과 인연이 깊다. 동래부사도 지냈다. 한양을 출발한 조선통신사 일행이 동래에 들어선 날 기록이다. “8월 20일 맑음. 동래에 도착했다. 동래는 내가 정축년(1757년 영조 33)과 무인년(1758
년)에 다스리던 지역이다. 금년 농사 형편을 물었더니…변방 백성들이 찌든 가난을 대부분 면하게 되었으니 기뻐할 만한 일이다.” “8월 22일 맑음. 부산에 도착했다.…의자를 놓고 앉아 큰 바다를 굽어보니 조금 쾌활함이 생긴다.” “9월 3일. 해운대는… 활달한 사내가 흉금을 드러내놓고 만 가지 형상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성대중은 ‘해사일기’ 서문에 “공의 훌륭한 업적이 영남지방에 많다”고 썼다.
■ ‘해사일기’와 ‘난중일기’
| |  |
| 영호(永湖) 조엄(趙曮·1719~1777) 선생. |
조엄은 유학과 문학을 깊이 공부한 선비·문인·관료였다. 유학의 본질을 안 놓치되 법가·병가 사상까지 섭렵하고 조화시키려 한 흔적을 ‘해사일기’에서 볼 수 있다. 이 점은 무인 이순신과 같다. “금지사항을 위반하는 일이 없다면 진실로 다행이겠지만, 혹시라도 법에 어긋나는 경우가 있으면 일의 형편상 용서하기 어렵다. 만 리 먼 길을 같이 가는 사람에게 법을 시행하는 일이 어찌 즐거워서 하겠는가?” ( 9월 20일 자)
사행 기간 내내 자상하게 고위직부터 말단까지 일행을 두루 챙기던 조엄은 오사카에서 통신사의 도훈도인 최천종이 일본인 손에 피살되는 초유의 사건이 터지자, 대처 업무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수석 통역사 세 명에게 “엄히 곤장을 친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휘하 정운 장군이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하자 가슴 찢어지게 통곡하고, 부하·백성에게 뭘 자꾸 나눠 주고, 어머니 걱정에 잠 못 이루면서도 군율과 원칙을 어긴 군인을 엄하게 대한다. 장수·병졸·민간인을 처벌하는 장면만 세어 보니 ‘난중일기’에 최소 113회 나온다.
“만일 (통신사 일행 500명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하여 다만 재주대로 맞게 쓴다면 쓸 만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요, 또한 끝내 버릴 자가 없을 것이다.”(11월 22일 자) “의지할 것은 충과 신이요, 행할 만 한 것은 너그러움과 공경이다. 사람을 감동시킴은 하늘을 감동시킴과 같으니 반드시 진실로써 응할 일이다.” (같은 날) 외교관이자 조직 책임자로서 그의 마음가짐이 이와 같았다.
■ 열린 태도와 사랑
| |  |
| 조엄의 ‘해사일기’. |
‘해사일기’에는 편벽하지 않고, 공익에 철저하며,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자 노력하는 조엄이 계속 나온다. 이는 결국 ‘사랑’에 가 닿는다. 오갈 때 각 한 번씩, 쓰시마 사스우라에서 조엄은 고구마를 부산으로 보낸다. 영도는 고구마 시배지가 된다. 요도우라를 지날 때 수차(水車)를 보고 허규와 변박에게 자세히 그리게 한다. 조엄이 ‘해사일기’에 고구마와 수차를 묘사한 문장은 홈쇼핑 화면으로 제품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백성의 삶이 나아지게 하려는 사랑이 없다면 꿈꿀 수 없는 장면이다.
‘해사일기’에서 특히 강렬한 장면을 꼽아본다. ▷통신사 배가 절망적인 난파 상황에 몰렸을 때 조엄이 담대하게 지휘하며 국서(國書)를 소중히 몸에 묶고 비장하게 임하는 모습 ▷최천종 피살 사건이 터지자 “필요하다면 오래 버티고 움직이지 않을 작정이었다”며 엄정한 수사를 촉구해 관철한 장면 ▷일본 관백을 만나 외교관으로서 원칙을 지키며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세. 그는 관념적 단견에 갇히지 않았다. 일본을 그대로 보려 했고, 자주 긍정하며 놀란다. “이것으로 미뤄 본다면 떳떳한 본성을 지닌 (두 나라 사람의) 천성이야 어찌 다를 수 있겠는가?” (10월 10일 자) 외교관 본분에도 철저하다. “쓰시마 지도와 인쇄된 일본 지도를 얻어 변박에게 베껴 그리도록 했다.” (같은 날)
현대로 이어진 일본 문화 특징도 잡아낸다. “저들의 습관이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반드시 시킨 후에 하니, 참으로 통분하다.” (신중하고 매뉴얼 중시·1764년 4월 30일 자) 조선 선비답게 풍류도 잊지 않았다. “오늘은 바로 정월대보름이다.…구름이 끼어 어두웠기에 회식만 했다. 유쾌하게 놀지 못했으니, 한스런 일이다.” (1764년 1월 15일·무로쓰) 학자로서 일본 역사·문화와 유학 계보를 단박에 꿰는 괴력도 발휘한다. (1764년 6월 18일 자) 조엄은 재발견돼야 하며, 오늘 한국에 더 많은 조엄이 필요하다. 꼭 평화로 나아가야 하는 한국 외교와 한·일 관계에서 더욱 그렇다.(국제신문 2020년 1월 30일 자 조봉권 국제 칼럼 ‘더 많은 김육·조엄 발굴 프로젝트’ 참조)
선임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