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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탄생 100주년 그를 회고한다 <9> 김주성 이병주기념사업회사무국장

비극적 시대 횡포에 맞선 신념…의미 있는 삶을 다시 생각하다

  • 김주성 국장
  •  |   입력 : 2021-10-31 19:15:28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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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까지
- 격동의 시대 배경 ‘꽃의 이름을…’
- 지고지순한 남녀의 사랑 그려

- 주인공 박태열의 순수한 열정
- 코로나 수난 시대 버티게 하는
- 한 줄기 삶의 지혜 일깨워 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휘감은 지 어언 2년, 아직도 뾰족한 출구가 보이지 않고 있다. 한 시대 ‘기록자로서의 소설가’ ‘증언자로서의 소설가’로 불리는 이병주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여행도 만남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수많은 사람이 생업마저 위협받는 이 글로벌 재앙의 시대를 어떻게 기록하고 증언할까. 선생이 살았던 노예 상태의 일제강점기, 해방정국의 이념 혼란기, 파괴와 죽음의 공포가 휩쓸던 전쟁기가 아니면서도 이 시대는 그가 말한 대로 한 개인의 의지나 신념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의 시대’라는 점에서 닮아있다.
이병주문학관은 하동군 북천면 이명산 품속에 자리 잡았다. 산은 활짝 핀 들꽃, 고운 단풍, 푸르른 상록수를 모두 받아준다. 전민철 기자 jmc@kookje.co.kr
■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

이병주 선생은 1965년 44세 늦깎이로 ‘소설·알렉산드리아’를 선보이며 작가의 길에 들어선 뒤 1992년 타계할 때까지 27년 동안 80여 권의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한달 평균 원고지 1000여 장을 써내는 초인적인 집필 활동의 결과물로서 우리 문학의 소중한 자산이다. 문학적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 그의 소설은 크게 역사 또는 역사 인물 소재의 작품군과 생전 당대 최고의 대중소설가라는 명성을 안겨준 현대사회의 남녀 애정 문제를 다룬 소설로 나눠볼 수 있다.

이병주문학관에서 만난 작가 이병주의 책. 전민철 기자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는 선생이 대중소설가로서 명성이 절정에 달한 1985년 발표한 작품인데, 필자가 서가에서 문득 이 작품을 뽑아 든 것은 이 소설을 통해 선생은 당시 대중과 어떤 이슈에 대해 소통하고 싶어했는지가 궁금해서였다. 이 소설은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인 남녀상열지사의 현대적 버전을 넘어, 거대한 시대와의 불화 끝에 좌절하고 말지만 미미한 개인으로서 이를 수 있는 지고의 경지까지 치달은 절대적 사랑에 대한 집념을 보여준다. 나는 이 집념의 사나이, 소설 주인공 박태열에 주목하면서 질곡의 현실 안쪽에 빛나고 있는 고갱이를 캐내고자 인고의 길을 택한 그의 순수한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그가 선택한 자신의 길에 대한 신념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코로나19 팬데믹 수난의 시대를 견디게 해줄 한 줄기 빛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적 역사를 관통하며 두 남녀가 지고지순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혼신을 다하지만 결국 좌절하고 마는 줄거리로 돼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않는 거대한 시대와의 싸움에서 패한 사실이 아니라 미약한 한 개인으로서 어떻게 신념을 지키면서 그 시대의 횡포에 대응했는가일 것이다. 작가 이병주는 박태열이라는 인물의 성격 창조를 통해 그 일단을 여실히 보여준다.

■ 왕오천축국·원추천인국

이병주 작품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에 나오는 기린초.
나는 이 소설 발단부, 개인적인 ‘왕오천축국의 추억’과 오버랩되는 대목에서 오싹한 데자뷔에 사로잡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이거 내 얘기잖아. 소설 주인공 남녀가 금강산에서 만나 꽃 이름을 묻고 답하는 장면이 나의 대학시절 한 때와 거짓말처럼 겹치고 있던 것이다.

때는 1980년대 중반쯤,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한 친구와 함께 안동 도산서원을 여행 중이었다. 우리는 그 길에서 마주오던 두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여정을 묻고 안내하는 사이 호감을 느낀 그네 중 한 명과 주소를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안동 어느 대학 원예학과생이었다.

길가에 화사하게 핀 꽃무리를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그녀에게 평소 궁금했던 그 꽃의 이름을 물었다. 요즘도 7월부터 코스모스가 만발하기 전까지 국도변이나 공원 한편에서 흔하게 보는 그 꽃 이름을 묻자마자 그녀는 ‘왕오천축국이요’라고 대답했다. 왕오천축국이라. 범상치 않은 사연을 품고 있을 듯한 그 이름은 그때 왕오천축국전과 혜초의 일대기를 과제로 수행 중이던 내 뇌리에 곧바로 각인되었다. 꽃 이름의 유래를 듣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마침 도착한 버스에 오르기 바쁜 그녀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곧 편지를 띄웠다. 크기는 훨씬 작지만 까만 꽃술을 둘러 황금빛 꽃잎을 풍성하게 펼친 모습이 해바라기를 닮은 그 꽃과 그녀의 이미지를 대비시키며 호감을 고백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는 수행 중이던 과제와 그 꽃의 연관성에 대한 추측까지 곁들여 원산지가 인도 혹은 그 일대가 아닐까, 혜초의 여행길에도 그 꽃이 피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의 나래까지 펼쳤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새 학기 준비에 바빠 그러려니 했지만 그 꽃들이 시들고 코스모스가 만발할 때까지 무소식이었다. 전해지지 않은 걸까. 재차 편지를 띄울까 고민하던 차에 나는 한 지인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거 내가 알기론 미국 어딘가에서 들어온 외래종인데.’ 아예 그 꽃 홍보맨이 돼 ‘왕오천축국’과 그녀와의 부풀린 여행담을 떠벌리고 다녔던 나는 뒤늦게 아차 하고는 도서관으로 달려가 식물도감을 뒤졌다. 아, 그 꽃은 ‘왕오천축국’이 아니라 ‘원추천인국’이었다. 북아메리카 원산으로 루드베키아라는 학명을 가졌으며 1959년께 국내에 도입됐다고 적혀 있었다.

■ 꽃피듯 지혜의 빛도

그녀의 해바라기 같은 화사한 모습에 정신이 혼미해져서였을까. 원예학 전공자인 그녀는 분명 ‘원추천인국’이라고 발음했을 텐데 왕오천국전에 빠져 있던 내 의식이 순간 난청을 일으킨 게 틀림없었다.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반성하는 내용을 담아 두 번째 편지를 띄웠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내 교만한 확증편향이 자초한 낭패감만을 오래도록 남긴 채 세월이 흘러가버렸다.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의 박태열은 어땠는가. 경성제국대 철학과 학생인 그는 원산고등여학교 졸업반 백정선에게 그녀가 궁금해하는 꽃의 이름을 ‘기린초’라고 일러준다. 집에 돌아와 뭔가 미심쩍어서 살펴보니 그 꽃은 기린초가 아니라 ‘꿩의 비름’으로 밝혀진다. 박태열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홀로 금강산을 다시 찾았고 그 꽃이 피어 있던 벼랑까지 올라 같은 돌나무과에 속한 두 꽃의 차이까지 알아낸다. 자신의 착각에 대한 부끄러운 심정을 토로하며 사실이 올바로 알려지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그녀의 학교 교장 앞으로 보내 공개토록 한다.

누가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고 현장을 다시 찾아 확인한 뒤 이를 바로잡기 위해 관련된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 그의 태도는 일견 자신의 처신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엄격해 보인다. 하지만 이 치열한 자기 엄격성이 백정선을 감동시킨다.

젊은 시절의 내가 착각한 왕오천축국과 박태열이 착각한 기린초 사연은 비슷한 스토리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르다. 나는 교만하고 어리석기까지 하여 가능성이 열려 있던 인연을 놓쳐버렸지만 그는 겸손하고 지혜로워 지고지순한 사랑의 여인을 얻게 된다. 그때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뒤늦게 반성문이나 작성하고 답장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박태열처럼 적극적으로 그녀의 학교로 달려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지 않았을까.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에서 설정된 시대는 자아상실을 강요받던 일제강점기, 이념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정국, 그리고 죽음과 파괴로 점철된 전쟁기였다. 이런 비극의 시대에서 박태열 같은 인물이 아니고서는 자기 신념을 지켜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작가 이병주는 몸소 겪었던 그 수난 시대를 돌아보며 인간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고 진실한 삶인가를 묻고 박태열을 통해 그 답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코로나19 펜데믹이 장기화되는 수난의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 줄기 견딜 수 있는 지혜의 빛을 선사하고 있어 보인다.

◇ 김주성 국장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 ▷경희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황순원소나기마을 문학상(연구상) 등.

※공동 기획 : 국제신문·이병주문학관·상지E&A/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그린조이

※후원 : 하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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