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물으면 항상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답하고, 술은 언제나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뚜렷한 취향을 고집하는 남자. 악당에겐 자비심 없는 총탄, 여성에겐 치명적 미소를 날리는 영국 비밀요원 007은 내겐 슈퍼맨과 다를 바 없는 슈퍼히어로였다. 내가 만난 첫 제임스 본드는 로저 무어였다.
어떤 위기가 닥치든 절대 당황하지 않고 신기하기 짝이 없는 비밀무기로 악당을 물리치고 ‘힘들긴요, 그냥 좋아서 하는 일인 걸요’ 라고 말하듯 여유로운 얼굴로 사라지는 제임스 본드는 천하무적 외계인 슈퍼맨과는 달리, 열심히 노력하면 어쩌면 언젠가 나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슈퍼히어로였다. 그런 연유로 ‘국민학교’ 입학 전 첫 책가방을 고르려고 엄마와 함께 가방가게에 갔을 때 007 가방이라 불리던 각지고 단단한 서류가방을 고집했으나, 단번에 무시당하고 뜨거운 울음을 삼킨 기억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본드 역은 티모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으로 바뀌었고 그새 내 취향도 변하고 때론 시시하게도 느껴졌지만, 의리를 지키기 위해 꾸준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2006년 ‘007 카지노 로얄’의 다니엘 크레이그를 만난 순간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포마드로 반듯하게 가르마 넘기기도 힘들 만큼 짧게 자른 금발에 우락부락 근육질 몸매. 살짝 느끼할 정도로 기품이 흐르던 이전의 제임스 본드들에 비해 온갖 고생을 사서 해온 듯 거친 노안의 사내. 어쩐지 악당 역에 적격일 듯한 크레이그는 명백한 미스캐스팅이라 생각했다. 당시엔 같은 이유로 분노한 팬들이 넘쳐났으나, 그는 꿋꿋이 15년 동안 역대 최장수 제임스 본드를 연임하고 최근 개봉한 ‘007 노타임 투 다이’를 끝으로 제임스 본드를 떠났다. 타고난 노안이라 그런지 15년 세월 뒤에도 세월의 흔적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젠 007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얼굴이 됐다.
다음 007 배우에 대한 소문이 난무한다. 아직 정해지지도 않았지만, 흑인여성이 007을 맡을 거란 소문도 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성소수자일 수도 있고, 경상도 출신 한국인 007도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어떻게든 007이 최장수 시리즈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그간 007을 지킨 다니엘 크레이그 형님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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