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춘궁기 배 채워주던 음식
- 멸치육수에 감자·나물 등 넣고
- 최대한 양 늘려 가족 끼니 책임
- 마을잔치에도 내놓던 단골메뉴
- 뻑뻑하지도 묽지도 않은 국물
- 막장 풀어 구수함·감칠맛 더해
- 오돌오돌 메밀의 식감도 일품
- 집집마다 조리법과 맛 제각각
정선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이런 고개 저런 고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산길을 오르내리던 자동차가 기어이 숨이 턱턱 막힐 때 쯤 정선이 눈 아래로 펼쳐진다. 정선아리랑, 아우라지 길에 접어드는 것이다. 동강의 물길이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정선을 휘감고 흐른다. 그리고 첩첩산중, 이리 봐도 산이고 저리 봐도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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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밀쌀에 멸치육수를 넉넉하게 넣고 온갖 식재료를 함께 넣어 끓여낸 메밀국죽. |
그래서인지 정선은 주로 밭농사에 기대어 온 지역이었다. 때문에 밭작물인 메밀 옥수수 감자와 깊은 산 속에서 채취하는 산나물 등속이 주요 식재료였다. 강원도 내륙지역이 다 비슷한 사정이지만 정선은 더 그러하다. 이 작물들은 춘궁기에 사람들의 끼니를 책임지던 구황작물이었다. 이들로 옥수수밥 감자밥 나물밥 등을 해 먹었다.
그보다 더한 시절에는 주위에 먹을 수 있는 모든 재료를 한데 끌어 모아 국물에 한 솥 푸~욱 끓여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먹기도 했다. 바로 ‘국죽’이다. 국도 아니고 죽도 아닌 음식, 국 같기도 하고 죽 같기도 한 음식이라 붙여진 이름이 국죽이다.
말 그대로 국죽은 적은 양의 쌀, 보리로 온 식구가 배를 채우기 위해 국이나 죽처럼 끓여낸 음식이다. 어떻게 하든지 끼니의 양을 최대한 늘려 식구가 다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 주위에 흔하게 나는 식재료를 가리지 않고 사용했는데, 해안가 마을은 허튼 생선과 해초가, 산간마을에는 잡곡 산나물이 주요 재료로 사용됐다.
경북 울진 등지에서는 ‘꾹죽’이라 하여 임연수어나 꽁치 미역 등을 섞어 국죽을 해 먹었고, 강원도 평창 정선 등지에서는 곤드레 취나물 등을 섞어 국죽을 만들어 먹었다. 경북 내륙지역의 김치 베이스로 죽처럼 끓여 먹던 ‘갱시기’란 음식도 국죽과 비슷한 유형이다. 주로 먹을 것이 부족했던 겨울이나 보릿고개 시절에 늘 먹어왔던 일상식이기도 했다.
정선은 쌀과 보리가 아주 귀했던 산골 지역이었던 까닭에 국죽을 메밀쌀로 만들어 먹었다. 정선 사람들은 이 음식을 ‘메밀국죽’이라 부른다. 메밀국죽은 메밀쌀에 멸치육수를 넉넉히 넣고 집에 있는 온갖 식재료를 함께 넣어 끓여낸 음식이다. 온 식구가 함께 나눠 먹기 위해 양을 늘려 먹던 음식이었기에 국 같기도 하고 죽 같기도 한 음식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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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밀쌀. |
집에서뿐만 아니라 마을의 큰 잔치가 있거나 집안 대소사 때 손님들에게 널리 대접하기 위해 만들던 ‘잔치 음식’이기도 했다. 때문에 메밀국죽은 가난한 시절의 추억을 소환하는 음식이기도 하지만, 마을 대소사에 빠져서는 안 되는 잔치 음식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정선장에서 메밀국죽 파는 가게를 수소문했다. 찾는 식당마다 취급하지 않는단다. 당황스럽다. “이상하다, 늘 먹어 왔던 음식이라던데…” 말을 흐리니 “국죽은 집에서나 해 먹는 음식이지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기실 밥 대신 먹던 대용식을 누가 외식으로 먹겠는가 싶기도 하다.
좌판에서 약재를 팔고 있던 촌로가 한 식당을 알려주며 “메밀국죽은 식당마다 공식적으로는 팔지 않고 간혹 예약한 단골들에게만 파는 음식”이라며 ‘타지에서 온 사람인데 맛이나 좀 보자’고 사정 얘기를 해보란다.
국죽을 판다는 식당에 들어가 차림표를 본다. 과연 차림표에는 메밀국죽이 없다. “메밀국죽을 먹을 수 있느냐” 물으니 2인분 이상 시키면 해주겠단다. 워낙 들어가는 재료가 많아 한 번 조리하면 여러 사람이 더불어 먹어야 할 만큼 양이 많아지기에 적은 양으로는 만들지 못한단다. 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 메밀국죽을 시킨다.
조금 시간이 걸린다기에 식당 안을 휘휘 둘러보다가 구석 한 곳에 있는 쌀자루에 눈길이 간다. 호기심에 들여다보니 메밀을 찧은 메밀쌀이다. 얼핏 보니 굵은 싸라기 같다. 식당 주인은 “요즘 메밀쌀이 비싸 국죽을 만들어 팔면 이문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래도 단골들이 심심찮게 찾기 때문에 만들어 판다고.
차림표에도 없는 메밀국죽이 한 보시기 상에 오른다. 휘휘 뒤져보니 국물이 뻑뻑하지도 않고 묽지도 않다. 메밀쌀과 다양한 부재료가 넉넉하고 푸짐하게 들어앉았다. 언뜻 보아도 멸치 두부 콩나물 감자에 곤드레나물 냉이 달래 파 청양고추… . 가만 보니 식당에 있는 재료는 다 들어간 것 같다. 국물에서 짙은 멸치육수 냄새가 난다. 부산사람으로서는 낯익고 흔쾌한 냄새다. 멸치육수에 미리 쪄 놓은 메밀쌀을 넣고 각종 부재료를 넣어 끓여내는 것 같다. 국물은 잘 익힌 막장을 풀어 구수하면서 감칠맛 또한 좋다.
한 술 떠먹으니 걸쭉하면서도 뜨거운 국물이 찌르르 목을 타고 넘어간다. 뒤이어 혀를 감싸는 칼칼한 매운맛이 금상첨화다. 이 정도의 국물맛이면 아주 술국으로도 제대로이다. 정선의 곤드레나물로 빚은 ‘곤드레 막걸리’ 한 잔 곁들인다. 젓가락으로 국죽 안의 냉이도 건져 먹고, 멸치도 한 점 집어먹는다. 참 괜찮다.
메밀국죽 한 숟가락 떠먹는다. 메밀쌀이 입 안에서 부드럽게 감긴다. 그런데 씹을수록 오돌오돌하게 씹히는, 기분 좋은 ‘가슬거림’이 느껴진다. 국은 아닌데 국처럼 시원하고, 죽은 아닌데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러면서도 오돌거리며 씹히는 식감도 좋다. 국과 죽, 밥의 특징을 함께 가진 ‘묘한 조화로움’의 음식이다.
주인장에게 국죽 만드는 법을 물어보니 별다른 조리법이 없단다. 집에 있는 식재료나 남은 음식들을 모두 털어 넣고, 멸치 삶은 물에 된장이나 막장을 푼 다음, 메밀쌀 넣고 국처럼 죽처럼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마다 메밀국죽의 생김새와 맛이 각기 다르단다. 집집의 부엌 사정이 다르다 보니 메밀국죽의 조리법도 다르기에 그렇다. 그러하기에 일반 식당에서는 정형화된 메밀국죽을 정식으로 팔 수 없을 수밖에 없겠다.
요즘도 정선에서는 마을잔치 때 밥상 위에 오르지 않으면 섭섭한 향토 음식 메밀국죽. 메밀쌀과 함께 있는 재료 없는 재료 다 털어 넣고 한 솥 끓여내, 마을 사람 모두 둘러앉아 나눠 먹었던 정선의 소울 푸드다. 동네에서 잔치가 없어지는 요즘 세태에, 점점 잊히는 우리의 ‘잔치 음식’이기에 더욱 소중하기만 한 메밀국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