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북서 양복점 꾸렸던 재단사
- 6·25 전쟁 때 가족과 부산으로
- 축음기부품 등 팔아 모은 돈으로
- 열악한 환경 속 음반제조사 설립
- ‘한 많은 대동강’‘오동동 타령’ 등
- 직접 작곡, 가창한 히트곡 다수
- 환도조치 때도 부산 굳건히 지켜
- 가수 발굴 등 대중음악 붐 선도
1950년대 초반 6·25전쟁의 피란시기에 부산은 도시 규모가 한 순간에 100만 명 규모로 팽창됐다. 가장 절박한 것이 먹고 사는 문제였지만, 고단한 삶을 버티게 하는 심리적 위안도 반드시 필요했던 시대였다. 노래만이 서민의 애환을 달래줄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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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피란시절 부산에서 음반제작자와 작곡자겸 가수로 활동했던 한복남(오른쪽)과 가수 손인호. |
날 저문 어느날 저녁 송도 바닷가를 한 청년이 술에 취해서 혼자 거닐며 ‘꿈에 본 내 고향’을 부르고 있었다. 일제치하 말에 발표된 그 노래는 히트를 하지 못했는데 그 노래를 절절히 부르는 걸 보면 필시 실향민의 한 사람이었다.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이가 있었다. 평안남도 안주 출생의 한복남(韓福男·1919~1991).
본명은 한영순(韓永淳)이다. 그는 고향에서 ‘일광양복점’이라는 가게를 꾸려가던 재단사였는데 대중음악을 몹시 즐기며 심취했다. 1942년 이동연예대에 입단해서 자신이 만든 ‘빈대떡 신사’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광복 직후 서울로 내려와 여전히 양복점을 열고 가창과 작곡에 심취해 있었다. 1947년 작곡가 김해송이 조직한 KPK악단 무대에 오를 기회를 얻어 ‘빈대떡 신사’와 ‘저무는 충무로’ 두 곡을 불러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격동의 시절,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가족과 부산으로 내려왔다. 절박한 궁핍으로 힘들게 들고 왔던 재봉틀까지 국제시장에 내다 팔았다.
당시 국제시장은 피란민이 갖고 온 온갖 물건을 거래하던 곳이어서 도떼기 시장이라 불렸다. 한복남은 시장을 돌다가 기이한 물건을 발견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RCA 빅터사 제조의 녹음기였다. 축음기 부품과 음반을 재생하는 바늘도 보았다. 그는 그것을 보는 대로 사 모았다.
양복재단사는 축음기 부품과 바늘을 판매하는 장사꾼으로 바뀌었다. 제법 수입이 쏠쏠해지면서 서구 아미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동사무소의 빈 공간을 어렵게 빌려 녹음실을 만들었다. 장비는 국제시장에서 구입해온 미제 녹음기였고 방음 장치는 출입문에 둘러치는 미군 담요와 가마니가 전부였다. 이런 어설픈 환경에서 음반을 만들었다. 음반 제조에는 무른 재료를 압축시키는 프레스가 필요했는데 그게 없으니 대용품으로 참기름 틀을 빌려다 썼다. 일단 음반 제조사가 만들어졌으니 이름이 필요했다. 부르기 쉽고 음악적 분위기도 느껴지는 ‘도미도레코드’라 붙였다.
당시 부산에는 코로나, 스타, 유니온, 신태평 등 수십 개의 레코드회사가 난립했다. 하지만 대개 도미도레코드처럼 열악하고 영세했다. 이렇게 만든 음반에 라벨을 붙이고 막걸리를 배달하는 짐자전거에 실어 국제시장에 직접 나가서 팔았다. 남포동 광복동 중앙동 일대의 다방을 돌면서 가족이 음반과 바늘을 팔기도 했다. 그때 나온 음반이 ‘홍콩아가씨’(금사향) ‘물방아 도는 내력’(박재홍) ‘꿈에 본 내 고향’(한정무) 등이다. ‘신라의 칼’ ‘에레나가 된 순이’(한정무) 등은 직접 자신이 곡을 붙인 노래다. 신인가수 허민을 발굴해서 ‘페르샤 왕자’ ‘백마강’을 히트시키기도 했다.
한복남은 도미도레코드사 대표로서 작곡과 가창까지도 직접 하며 음반을 냈는데 크게 히트한 곡이 많았다. ‘오동동 타령’(황정자) ‘처녀뱃사공’(황정자) ‘앵두나무 처녀’(김정애) ‘한 많은 대동강’(한복남) ‘엽전 열닷냥’(한복남) ‘불국사의 밤’(현인) 등이다. 도미도레코드의 성공을 눈 여겨 지켜보던 임정수가 서구 남부민동에 미도파레코드사를 새로 열었다. 이 회사도 당시 피란시절의 대중음악 붐에 힘입어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빅토리’란 이름의 자회사까지 만들어서 작곡가 백영호에게 위탁을 하기도 했다.
1950년대 초반 부산에서 한복남이 펼친 활동은 눈부시다. 음반제작기술과 재료 조달을 위해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 대표 이병주를 찾아가 아들과 함께 제조공장에 머물며 기술 연수를 받기도 했다. 그 아들이 나중에 작곡가로 성공한 하기송(본명 한정일)이다. 부친과 고락을 함께 하며 자연스럽게 대중음악인으로 성장했다. 아버지와 ‘한복남, 하기송 작곡집’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음반의 노래는 가수 한명숙 최희준이 앙상블로 취입했다. 한복남의 대표곡으로는 ‘나그네 밤거리’ ‘맘보타령’ ‘청춘 마도로스’ ‘전복타령’ ‘백제야화’ ‘정들자 이별’ ‘마음의 부산항’ ‘충무로의 밤’ ‘오동동 사나이’ ‘청춘등대’ ‘잊지 못할 순이’ ‘물새야 왜 우느냐’ ‘동백꽃 일기’ ‘경상도 사나이’ ‘비 오는 정거장’ 등 600곡이 넘는다.
1953년 임시수도를 서울로 다시 복귀시키는 환도 조치가 있었다. 대다수의 피란민이 부산을 떠날 때에도 한복남은 부산에서 도미도레코드사를 굳건히 지키며 줄기차게 음반을 발매하는 한편 새로운 가수를 발굴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다. 오늘날 풍요와 번영을 누리는 부산시민은 1950년대 그 가혹하던 시절의 대중음악 종사자의 노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도미도레코드와 미도파레코드사 등 음반사가 어디에 있었는 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부산시 문화담당 부서에서는 1950년대 부산에서 활동하던 대중문화의 장소와 인물, 그 활동 성과를 다시금 정리해 책으로 발간하고 보존할 것을 제안한다. 뿐만 아니라 부산 근대가요사박물관을 설립해 당시의 자료와 이제는 거의 소멸 위기에 있는 귀중한 자료를 수집해 그 빛나는 가치를 후대에 널리 이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