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다섯 황제부터 한무제까지
- 총 130편 중 ‘열전’ 70편 최다
- 권력과 인물의 오욕칠정 까발려
- 행적 따른 세계 첫 기전체 사서

- 소신 지키려다 치욕 당한 저자
- “성공하면 충신, 실패하면 역적”
- 현실·실증주의적 사관 드러내
- 하늘의 도리 무엇인지 묻기도

중국 전한 시대(기원전 202~8년)에 군수 창고로 쓰였던 하창성 유적이 길게 모습을 드러냈다. 군량과 마초를 비축했다. 간쑤성 둔황 옥문관 북동쪽에 자리 잡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경제학 명언인데, 투자 달인 워런 버핏(90)은 여기에 코를 걸어 수십억짜리 점심 식사를 만들어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도 그 이치대로 세상이 굴러갔다. 사마천(司馬遷)이 쓴 중국 고대 역사서 사기(史記)가 증명한다.

제나라 맹상군(孟嘗君, ?~기원전 278)은 부와 권력을 누렸다. 그는 조나라 평원군(조승), 위나라 신릉군(무기), 초나라 춘신군(황헐)과 함께 전국시대 사공자로 불렸다. 기인·귀재 3000명을 식객으로 뒀다. 떵떵거리던 그였지만 모함을 받아 재상 벼슬에서 쫓겨나자 객사가 텅 비었다. 식객인 책사 풍환이 맹상군을 일으켜 세웠다. 힘을 되찾은 맹상군이 자신을 떠난 식객들을 비난하자 풍환이 그들을 다시 받아들여야 옳다며 한 말. “부유하고 귀하면 사람이 많이 모여들고, 가난하고 지위가 낮으면 벗이 적어지는 세상 이치를 어찌 모르십니까?” (열전 15편)

사기는 중국 24개 역사서 중 으뜸. 요순 전설 황제부터 한 무제까지 이어 서술한 유일한 통사다. 본기-표-서-세가-열전, 5종 합해서 130편. 그중 ‘열전’은 70편으로 최다. 황제 제후 장군 군자 책사 간신 충신 부자 환관 제자백가 명의 왕후 애첩 협객 점술가 도둑 남색가 모창꾼 익살꾼…. 온갖 인물이 오욕칠정을 쏟아낸다. 핵심은 권력과 인간.

고대-현대 중국은 다르다. 고대부터 뺏고 빼앗기고 권모술수에 능한 건 여전하다. 제후국 간에 늘 전쟁을 치르며 이익을 재 왔다. 인을 강조한 공자가 발붙일 데가 없었다. 자공 같은 부자 제자가 보필하지 않았으면 아주 망했을 터이다. 땅은 아주 넓어서 문화와 민족이 천차만별. “조나라 사람은 경박하고 쉽게 변한다”는 말이 사기 열전에 자주 나온다. 세상 중심에 자신들을 놓고 콧대를 높이는 건 불변. 지금도 국제 사회에서 미움받는 이유다. 공산 정권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 현대 중국이 바라는 세계 1위? 요원하다.

■ 열전 70편, 태사공은 말한다

제나라 수도인 임치를 상상해 복원했다.

사기 열전엔 전승에 눈먼 제왕 제후 장군이 엮어낸 얘기가 많다. 권력층이야 승전해 이익을 챙기는 게 최대 목표. 하지만 전장에 남편·아들을 내보낸 여인은 무사 귀환을 바랄 뿐이다.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장군이 두 사람을 끔찍이 아꼈다면 그녀가 눈물겹도록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손자 오기(吳起) 열전’을 보면 그렇지 않다. 장군 오기가 위(衛) 나라 문후를 위해 출전했을 때였다. 오기는 종기가 난 병사를 보자 환부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았다. 그 소문을 들은 병사 어머니가 슬피 울었다. 주변 사람이 까닭을 물었다. 어머니 대답. “장군이 아들처럼 제 남편도 종기를 빨아 준 적이 있습니다. 남편은 그 후 적진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다 죽었는데 아들도 이제 생사를 기약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사마천이 ‘남성’을 빼앗긴 치욕을 안고 쓴 사기는 처음엔 홀대받았다. 당대(當代) 경제·무제를 비판한 효경·효무 본기가 한때 사라졌다. 한나라 건국 이념인 유학에 배치되는 제자백가를 다뤄 지식인들도 등을 돌렸다. 그러다 사기는 도가를 환영한 당나라 때(唐代) 관리 임용 과목이 되면서 활기를 얻어 기세가 송대로 이어졌다. 원대에 주춤했다가 청대 들어 상승세를 탔고 중국 근대화 시기에 명성을 얻으며 서구에도 소개됐다.

열전 각 편에 단 소제목에서 저자 사관(史觀)이 드러난다. ‘백이와 숙제는 정말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을까?’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게 하늘의 도인가?’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때가 아니니 기다리십시오’ ‘성공하면 충신이고 실패하면 역적이다’ ‘사람의 성격에 따라 조언도 달라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 ‘독사에게 물린 손은 잘라야 한다’…. 현실에 발 딛고 저 멀리 이상을 응시하는 사마천 시선이 느껴진다.

사기는 역사를 문학작품처럼 읽기 쉽게 서술하는 ‘문사일체(文史一體)’ 필체로 쓰였다. 19편 ‘범저 채택 열전’은 대화체다. 책사 채택이 진나라 재상 범저를 만나 부드러우면서도 정곡을 찔러 가며 용퇴를 권유하는 장면이다. 편지글도 보이는데, 병법가 악의가 연나라 소왕에게 띄운 ‘보연왕서(報燕王書)’다. 신하가 군주에게 갖춰야 하는 의(義)가 무언지 썼다. 당대 충성스러운 대장부가 곁에 두고 자주 읽었을 법하다.

사기는 다양한 인물이 보여준 행적을 중심으로 당대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 즉 기전(紀傳)을 따랐다. 세계 첫 기전체 역사서다. 본기(本紀·12편) 표(表·10편) 서(書·8편) 세가(世家·30편) 열전(列傳·70편). 본기는 전설상 중국 다섯 황제부터 한나라 무제까지 왕조와 군주가 보인 사적을 실었다. 표는 시간과 장소별 중국 고대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서는 치수 천문 정치 경제 문화 같은 각 부문을 다뤘다. 세가는 봉건 제후·신하, 나라 역사를 들여다봤다. 저자 부친 사마담이 사기 저술을 시작해 아들에게 넘겼다. 후대 저소손이 쓴 글이 일부 보태졌다. 원래 서명은 ‘태사공서(太史公書)’ ‘태사공기(太史公記)’. 태사는 사마천 관직명. 열전 본문에서 “태사공은 말한다”며 자기 의견을 당당히 밝힌다. 그러려고 사기를 썼으니까. 궁형을 당한 처지라 어조가 고분고분할 리 없다. 비분강개하고 사감을 공공연히 드러내기도 한다.

■ 노자·한비·상앙·중니·화식…

진시황제는 사상서를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중국 고대사는 주나라가 망한 뒤 50개 제후국이 난립해 복잡해졌다. ‘진 한 위 제 초 연 조’가 살아남아 전국칠웅(戰國七雄) 시대를 열었다. 형세는 3강(진-초-연) 4약(한-위-제-조). 합종연횡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도. 황제·제후를 좇는 신하는 천태만상, 나라를 살리겠다는 유세객이 모여든다. 그들 운명은 바람 앞 등불. 한비자는 ‘세난(說難)’ 편에서 신하는 군주가 감춘 역린(逆鱗)을 건드리지 말아야 목숨을 지킨다고 썼다. 그랬던 그는 진시황에게 불려 갔다가 모함을 받아 독배형을 받아 죽었다. 사마천은 한탄한다. “한비자는 세난 편을 짓고도 스스로 재앙을 피하지 못하였으니 슬플 뿐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유명한 격언이지만 이와 반대인 “옛것을 따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는 말이 ‘상군열전’에 나온다. 개혁·혁신을 내세우는 현대 표어 같다. 이 말을 한 위인은 전국시대 법가 정치가 상앙(商鞅). 그는 진나라 왕 효공에게 나라를 부강하게 해줄 개혁안을 제안하지만, 왕이 민심 이반을 두려워하자 이렇게 잘라 말하며 밀어붙였다. “평범한 사람들은 옛 풍속에 빠져들고, 학자들은 자기가 들은 것에만 빠져듭니다.” 전제주의와 사상 탄압에 기반 이론을 제공한 법가를 대변했던 상앙. 저자는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열전에 올린 까닭은? 상앙이 통일 진나라를 탄생케 한 주역 중 한 사람으로 현실 역사 속 비중이 남다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열전 중 1편 ‘백이 열전’, 69편 ‘화식 열전’에서 사마천은 현실·실증주의 사관을 강하게 드러낸다. 70편 ‘태사공 자서’가 뒤에 붙은 머리말. 사실상 69편이 마지막 편이다. 저자는 열전 처음과 끝에 자기 색채를 심었다. 1편에서 묻는다. “선한 이(안회)는 빨리 죽고, 악인(도척)은 천수를 다하는 게 하늘 도리인가?” 천도시비(天道是非)로 논의를 열고 69편에서 답한다. 여기서 도를 하늘이 아니라 땅, 즉 부(富)에서 찾았다. 속죄금 50만 전이 없어 궁형을 당한 처지라 그런 가치관을 갖게 됐을까. “부에서 권력이 나오며, 재력을 갖추려면 상업을 해야 한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권력 지형이 윤곽을 드러냈다. 선거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민심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천도가 무엇이냐고 기원전 사마천이 물었는데 이번 대선이 그 답을 해줬다. 누가 이끌지 않아도 민심은 자기 뜻을 항상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