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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년…나림 문학과 아나키즘 <2> 유작 ‘별이 차가운 밤이면’과 아나키즘

유작서 고상한 아나키스트 김산 소개… 교활한 일제 밀정 고발도

  • 조광수 전 영산대 중국학과 교수
  •  |   입력 : 2022-05-08 19:37:27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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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인 저널리스트 님 웨일즈
- ‘아리랑의 노래’서 김산 극찬

- 소설 주인공 박달세 변신에 능해
-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위장
- 이채란은 전설적 이향란이 모델
- 상하이 ‘육삼정 의거’ 복선 눈길

이병주의 유작인 ‘별이 차가운 밤이면’에는 님 웨일즈가 극찬했던 김산 이야기가 나온다. 김산은 아나키스트였다. 본명은 장지락. 동족의 무고로 즉결처분된 비극적 혁명가다.
‘아리랑의 노래’의 주인공인 비극적 혁명가 김산(왼쪽), 이 책을 쓴 미국 저널리스트 님 웨일즈(가운데), ‘야래향(夜來香)’을 부르며 중국인 연예인(李香蘭·이향란)으로 활동한 일본인 야마구치 요시코. 이향란은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두 개의 이름으로 사는 등 변신의 귀재였다.
■‘아리랑의 노래’ ‘중국의 붉은 별’

다른 신분으로 위장하며 살게 될 박달세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이채란을 운명처럼 만나는 장면도 인상적이지만 이채란이 상하이를 떠나면서 ‘아리랑의 노래(사진)’란 영어 책을 선물하는 대목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박달세는 김산이란 인물을 통해 고귀한 인품에 주눅 들게 되고, 독립운동이 설령 실효가 없다 하더라도 그 불굴의 정신만큼은 소중하다는 인식을 얻게 된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우는 ‘중국의 붉은 별’을 써서 마오쩌둥을 서방 세계에 알린 공으로 평생 중국 지도부의 올드 프렌드 대우를 받았다. 정말 중국을 사랑한 그는 베이징대학 경내에 묻혀 있다. 그의 부인인 헬렌(필명 님 웨일즈) 또한 현대 중국에 관한 대단한 저술을 남긴 저널리스트로 “옌안(延安)에서 다독가이자 영어가 통하는 인사를 찾던 중” 조선인 혁명가 김산을 만나 집중 취재했다. 뜨르르한 중국 혁명가를 제치고 유독 형형한 눈빛의 과묵한 이방인 김산에게 마음을 준다. 몇 개월에 걸친 인터뷰를 기반으로 쓴 ‘아리랑의 노래’에는 작가의 김산을 향한 연민과 찬사가 그득하다. 애틋한 연모의 감정마저 느껴진다. 님 웨일즈는 “우정을 넘어 매그네티즘(magnetism)이었다”고 회고했다.

■님 웨일즈가 높이 평가한 김산

‘아리랑의 노래’
나림은 헬렌 스노우가 김산을 높이 평가한 이유를 “그는 내가 동양에서 지낸 7년 동안에 만난 사람 가운데 최고의 한 사람이었다. 그에겐 다른 혁명가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데가 있었다. 독립불기(獨立不羈)한 정신, 두려움을 모르는 대담성, 완벽한 침착, 그의 결연한 주장은 이론과 경험 쌍방에서 도출된 결론으로 보였다. 외양은 은사(隱士)처럼 조용하지만 격렬한 저력의 소유자다. 도덕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청렴결백하며 일체 거짓이 없는 사람으로 느꼈다”고 설명했다.

박달세는 반쯤 넋을 잃고 밤 세워 그 책을 통독한다. 차마 김산의 사상에 동조하지는 않지만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인생을 살아온 당당한 모습에 숙연해진다. “김산과 나는 언제든 충돌할 운명에 있다”며 고민하다가 지리멸렬해지기도 하지만 결국은 현실주의자로 되돌아온다.

이어 ‘중국의 붉은 별’을 읽고는 이상주의적 혁명 열정에 질식할 정도로 도취하기도 하고 공포에 가까운 충격을 느끼기도 한다. 마오쩌둥은 ‘인간 다이너마이트’라 불릴 만큼 에너지 절륜의 인물이다. “하늘과 다투니 즐겁고, 땅과 다투니 즐거우며, 사람과 다투니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를 외는 천생 파이터였다. 결국, 한 손으로는 천하통일을 이루지만 다른 한 손으론 천하대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마오쩌둥은 모순이 가득한 복잡한 캐릭터의 인물이다. 마오이즘이란 치밀하고 박력 있는 사상 체계를 만든 탁발한 지성인이자 내공 깊은 문화인인가 하면 투쟁과 폭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광인이기도 하다.

스노우 부부가 각각 쓴 위 두 권의 영어 책을 박달세에게 선물한 이채란은 두 가지 역할을 위해 등장한다. 하나는 김산이란 고상한 아나키스트를 소개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박달세의 거듭되는 변신에 비견하는 역할이다. 한국인 박달세에서 중국인 방세류와 일본 특무대의 엔도오 대위로 여러 신분을 위장하며 사는 박달세의 기구한 입장을 이채란이 시연하는 것이다.

■이채란의 모델은 실존인물 이향란

작품 중 이채란은 실존인물 이향란을 모델로 삼았다. 중국에서 중국인 연예인으로 활동했지만 이향란은 사실 일본인 야마구치 요시코이다. 당시 중국은 물론이고 나중에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야래향(夜來香)’ ‘소주야곡(蘇州夜曲)’ 등의 노래를 부르고 ‘만세유방(萬世流芳)’ 같은 영화에 출연한 당대의 슈퍼스타였다. 중일 전쟁 기간에 일본을 선전하는 선봉 역할을 하지만 전후에 부역자 내지는 한간(漢奸)으로 군사 재판을 받는다.

일본인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추방돼 일본 홍콩 미국 할리우드에서 예능인 활동을 이어간다. ‘전쟁과 평화’ ‘솔로몬과 시바’의 감독 킹 비더가 연출한 영화 ‘재패니스 워 브라이드’ 등에서 주연을 맡았다. 미국에선 셜리 야마구치로 불렸다. 한때는 주한 일본 대사관의 참사관인 남편을 따라 서울에서 지내기도 했다. 당시엔 오타카 요시코였다. 50대 중반에 참의원이 되어 3선을 연임하고 정무차관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아흔 넷까지 장수했다. 일생에 걸쳐 기막힌 변신과 곡절, 그리고 성취를 이뤘다.

■내력 불명의 독립운동가

나림이 참고한 실존 모델이 있었겠지만 사실 해방 정국이나 이후 대한민국 시절 초기에도 내력 불명의 인사가 독립운동가 출신 연하던 일이 적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로 그게 가능했다. 우선, 기왕에 변신에 능한 인물이라면 기회와 위험이 교차하는 상황은 오히려 불감청고소원이기 때문이다. 다음, 일본의 첩자나 반간(反間) 활용 기법이 워낙 은밀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지 인사 다루기는 참으로 집요하고 교묘했다. 문서로 남겨진 내용마저 거의 없다. 밀정은 특히 대응하기 힘든 존재였다. 독립운동가 유자명은 “수단도 교활하고 깊이 잠복하는 탓에 밀정이 쳐놓은 함정 때문에 희생자들이 많았음”을 아프게 회고했다. 우당 이회영이 마지막 사업을 위해 이동하던 중 체포되어 중국 다롄 감옥에서 결국 순국하게 되는 것도 밀정의 밀고 때문이었다. 홀로 기선에 승선해 만주로 가는 우당이 형님 석영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걸 조카들이 엿듣고 일본 첩보기관에 밀고한 것이다. 천하의 우당 가족이 밀정이었다. 현실은 영화 ‘암살’이나 ‘밀정’에서 보는 그 이상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로 미스터리한 과거를 숨기고 우국지사인양 행세한 사람이 실제 있었고, 그들의 악행을 뒤늦게라도 응징한 동정람 같은 지사도 있었던 것이다. ‘산하’에선 그런 인사를 기어이 찾아내 응징하고 서울 한복판에 전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단편 ‘변명’에선 그런 인물의 행세를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무력감을 변명하기도 한다.

조광수 전 교수
‘별이 차가운 밤이면’에선 ‘중경 임시정부 내 첩자의 정보로’ 상하이에 파견돼 온 공작원 셋을 체포하는 장면이 박진감 있게 묘사된다. 밀정을 부리고 그들의 밀고로 독립투사들을 체포 취조하는 곳이 바로 박달세가 꼭두각시 대장 노릇을 하는 엔도오 기관이다. 그 사건이 있었던 날 밤, 일본 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박달세 등 일본 기관원들이 질펀한 술자리를 갖는 장면도 다분히 의도적인 배치다. 육삼정은 아나키스트 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백정기가 거물 외교관 아리요시 아키라를 저격하려다가 밀정의 고변으로 실패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육삼정 의거’와 박달세의 행차 사이에는 다소의 시간이 격해 있지만 굳이 한 대목 설정한 나림의 뜻이 유심하다.


◇‘별이 차가운 밤이면’

- 계간지에 10회 연재, 나림의 미완성 유작

‘별이 차가운 밤이면(사진)’은 나림의 미완성 유작이다. 타계하던 해 봄까지 계간 ‘민족과 문학’에 10회 연재하다가 중단된 작품이다. ‘민족과 문학’ 창간호인 1989년 겨울호부터 1992년 봄호까지다. 주인공 박달세의 중국 상하이에서의 암약이 아직 정점에 이르지 않았고, 해방 이후 곡절과 변신은 아예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버린 셈이다.

독자로선 너무나 아쉬운 대목이다. “현실적 인간으로서의 승리를 노리는” 박달세의 자질과 능력에다 악의까지 더해진다면 이채란 이상의 요란하고 화려한 변신이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워낙 명석한 데다 이재에 밝고 “치파우와 양복이 다 잘 어울리는 타이론 파워(미국 유명 영화배우)를 닮은 미남자이니” 난세에 어떤 가능성인들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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