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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그곳에서 만난 책] <132> 최정란 시집 ‘독거소녀 삐삐’

명랑한 소녀감성 이면에 드리운 우울, 옛시절 열광한 삐삐 빼닮아

  • 박현주 책 칼럼니스트
  •  |   입력 : 2022-06-12 19:40:18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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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본지 신춘문예로 등단
- 인생의 명암을 작품 속에 녹여
-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싶단 생각
- 시 쓰며 살아가는 원동력 됐죠”

어린 시절 TV 드라마에서 만난 말괄량이 삐삐는 멋진 아이였다. 어른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순종적인 소녀가 아니었다. ‘모범생 만들기 병’에 걸린 어른이 보면 기절초풍할 이 설정이야말로 아이들 입장에서는 신나는 캐릭터였다. 사랑하는 아빠는 선장이라서 먼 바다로 떠나고 없었다. 하지만 삐삐는 혼자서도 씩씩하게 살았다. 무거운 짐도 번쩍 들만큼 힘도 셌다. 당당하고 용감하며 자유로운 삐삐가 늘 부러웠다. 드라마를 본 후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원작 ‘삐삐 롱스타킹’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 드라마 속의 삐삐가 튀어나왔다. 그렇게 동경했던 삐삐를 시집 제목으로 다시 만났다. 최정란 시인의 신작시집 ‘독거소녀 삐삐’이다. 삐삐는 혼자 살고 있으니 독거소녀가 맞다. 그런데 제목을 천천히 되뇌어보니 어쩐지 슬프다. 혹시 삐삐가 혼자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최정란 시인의 삐삐가 궁금했다. 최 시인을 회동 수원지 생태길에서 만났다.
부산 금정구 회동 수원지 생태길에서 시집 ‘독거소녀 삐삐’를 낸 최정란 시인을 만났다.
■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소녀

“말괄량이 삐삐 좋아하세요?” 첫 질문을 던졌다. 최정란 시인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양 갈래로 묶은 머리를 보여준다. 장난삼아 양 갈래 머리를 옆으로 바짝 치켜드는 모습에서 삐삐가 떠올라 웃음이 터졌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소녀가 보였다.

독거소녀 삐삐- 최정란 지음 / 상상인 / 2022
생태길을 걷다가 수원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넓은 테이블과 벤치 하나를 차지했다. 부산 갈맷길 구간 중 인기가 많은 코스이기도 하고, 인근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라 그런지 평일에도 사람이 많았다. 빈 테이블이 나기까지 잠시 기다려야 했다. 최 시인이 흰 레이스 식탁보를 펴고, 직접 준비해 온 점심 도시락을 내놓았다. “집에서 천천히 걸어 여기까지 옵니다. ‘나의 월든 호수’라고 이름도 붙였답니다. 소풍 온 것 같죠?” 잔잔한 호수 위를 지나 온 바람이 시원했다.

최정란 시인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계명대 영문학과와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장미키스’ ‘사슴목발애인’ ‘입술거울’ ‘여우장갑’을, 2022년 봄에 ‘독거소녀 삐삐’를 냈다.

최 시인과 만나는 일정을 잡기 위해 연락을 했을 때 그는 부산역, 김해공항, 북항터미널 이야기를 했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 고등학교 때까지 상주에서 살았는데 어릴 때부터 늘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만화소녀시대’라는 시에 그 마음을 담았지요.” 시집 ‘독거소녀 삐삐’를 꺼내 그 시를 펼쳐보았다. “지난밤이 아침을 후회할 날 있을까/ 삼엄한 낮의 파수꾼이 지키는 열일곱 살 여름/ 밤마다 투항하듯 편지를 쓴다// 제발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 주셔요” 라는 구절이 있다. 필자가 밑줄을 그은 대목도 마침 그 구절이다.

최정란은 7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고등학생이거나 결혼을 한 언니들은 나이차가 많은 어른 같은 존재들이었다. 공부 잘하고 착한 딸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조금쯤 외롭고 심심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모범생이었을 것 같다는 질문에 최정란 시인은 손을 내저으며 옛 추억을 들려주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만화방에 가느라 학교를 안 간 적이 있어요. 나중에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와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지요.” 누에를 치는 철이 되면 어머니는 먼 곳까지 나가 사람들을 데리고 일을 했다. 며칠 만에 한 번씩 집에 들러보며 딸에게 용돈을 주고 갔는데, 그 돈으로 만화방에 간 것이다. 착한 학생이 학교를 안 나와 놀란 담임이 전화를 했는데 받는 사람이 없었단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담임이 집까지 찾아온 것이다. “대형사고, 일탈이었네요”라고 맞장구를 치며 한참 웃었다. 최정란 시인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일이란다.

■ 시는 나의 존재 이유

최정란 시인은 차분하게 소녀 시절을 들려주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죠. 언니들이 보는 책도 읽고, ‘학생중앙’ ‘여학생’ 같은 잡지도 읽고, 시에 관심도 많았습니다.” 대학 시절 문학상도 받았던 그가 다시 시를 쓴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였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생로병사를 겪지요. 어머니를 보내면서 모든 것이 다 헛되구나 싶었는데, 마지막까지 제게 남아 있는 게 시였습니다. 안 쓰고도 살 줄 알았는데, 안 쓰고는 못 살겠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시를 쓰면서 나를 알게 되고 살게 하는 힘을 얻었으니, 시는 나의 존재 이유라 할 수 있겠죠. 남이 읽어주기를 바라면서 쓰지는 않았지만, 국제신문에서 신춘 당선 소식이 왔을 때 제 존재를 인정받은 것 같아 너무 기뻤습니다. 꺄악~ 하고 비명을 질렀는데, 당시에 제게 전화를 걸었던 담당기자님이 지금도 그 일을 기억하시더라고요.”

‘독거소녀 삐삐’에는 소녀처럼 명랑한 감성, 그 감성 밑바닥에 고인 우울을 담은 시들이 함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우울과 명랑이 시시때때로 교차하는 삶을 살아간다. 명랑할 때는 만사가 재미있는 풍경이지만, 그 풍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둠이 있고, 누군가는 울고 있다.

산문시 ‘고군분투’는 조금 떨어져서 세상을 보는 기분이다. “평화에서 적을 발견한다 적이 없으면 적을 심고 적을 기른다 적이 자라지 않으면 뚝딱뚝딱 속성으로 적을 만든다 교실은 성적을 빙자해서 적을 만들고, 회사는 실적을 올리는 막대그래프에 적을 올려 보내고, 가족은 본적에서 파낸 말놀이로 적을 울린다 (중략) 서로를 적으로 만드는 큰 축제가 몇 년마다 열린다 이 축제 기간 동안 적이 없는 사람은 소속감이 없어 외로워진다 소외감 때문에라도 적을 만든다 (하략)” 적, 적 하며 읽다보니 재미있게 읽히는데 생각할수록 답답한 세상살이가 떠오른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소녀는 시인이 된 이후에는 어떤 세계로 가고 싶었을까.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최정란 시인은 지나온 세계, 지금 바라보는 현실, 꿈꾸는 세상을 시로 쓰고 있다. 그는 시의 땅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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