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후원 펀딩으로 제작비 모금
- 배우 등 재능기부로 영화 완성
- 주인공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
- 일본군에 끌려가는 장면 등 배경
- 금원산·현성산 아래 105㏊ 논
- 전봇대·전선·비닐하우스 등 없어
- 사진작가 발길 이어지는 핫스팟
- 친환경 농법 고수 … 공원도 조성
경남 거창군 위천면에 있는 ‘서덕들’은 한국영화사에 특별한 발자취를 남긴 작품 ‘귀향’의 촬영지다. 일제강점기 위안부의 참상을 고발하고 피해자의 영혼을 달래는 영화 ‘귀향’은 12년의 준비 끝에 스토리 펀딩을 통한 전 국민의 참여와 기부로 완성됐다. 서덕들은 영화 전반에 걸쳐 주인공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위안부로 끌려가는 장면의 배경이었던 만큼 관객의 뇌리에 깊게 각인된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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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군 위천면의 서덕들을 배경으로 촬영한 영화 ‘귀향’의 한 장면. 거창군 제공 |
■실화 토대 역사의 증거물
2016년 2월 개봉한 영화 ‘귀향’은 위안부 피해자인 ‘강일출 할머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이 영화로 제53회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받은 조정래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강하나(정민 역) 서미지(영희 역) 최리(은경 역) 씨 등이 출연했다. 특히 ‘귀향’으로 데뷔한 최 씨는 거창 출신이라는 점에서 거창 군민의 관심이 컸다.
영화 줄거리를 보면 1943년 열네 살의 정민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 손에 이끌려 가족 품을 떠난다. 정민은 또래 아이와 함께 전장 한 가운데서 끔찍한 고통과 함께 버려져,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영화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과거 참사 현장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영옥)와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부모를 잃은 소녀(은경)가 함께 과거와 현재를 치유한다는 내용이다.
‘귀향’은 2002년 ‘나눔의 집’ 봉사 활동을 하던 조정래 감독과 강일출 할머니의 인연으로 시작됐다. 그림 심리치료를 받던 강 할머니의 ‘태워지는 처녀들’ 그림을 본 조 감독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림에는 일본군이 한 구덩이에 처녀들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학살하는 장면이 담겼다. 이후 조 감독은 생존 할머니를 일일이 찾아가며 인터뷰를 통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조 감독은 유대인 학살 참상을 다룬 ‘쉰들러 리스트’(1993) ‘인생은 아름다워’(1997)처럼 위안부 피해 여성의 삶과 고통을 영상으로 기록해 ‘문화적 증거물’로 남기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러나 조 감독의 영화에 투자하려는 투자자가 나서지 않으면서 시나리오는 10년간 빛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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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신주와 비닐하우스 등 인공 설치물이 없는 서덕들 전경. 거창군 제공 |
■국민 응원받아 제작한 영화
투자자를 만나지 못한 시나리오는 잊힐 위기에 놓였지만, 조 감독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크라우드 펀딩’으로 도전에 나섰다.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두 차례에 걸친 뉴스 펀딩과 유캔 펀딩(사회적 기부 방식 펀딩), ARS 문자 후원 등 다양한 방법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해 총 7만5270명의 후원을 받았다. 영화 제작비의 절반이 넘는 12억여 원의 제작비가 모였고, 일본과 미국 등 전 세계 각지에서 후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배우와 촬영 스태프도 재능기부로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원로 배우인 손숙을 비롯해 오지혜 정인기 등 연기파 배우가 재능 기부 의사를 밝혔다. 어린 ‘영희(서미지)’ 역의 현재 역할인 ‘영옥’ 역을 맡은 손숙은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노 개런티 출연 의사를 밝혔다. 영화 제작이 마무리되자 조 감독은 2015년 12월 ‘나눔의 집’과 거창군에서 첫 시사회를 했다. 시나리오 구상 이후 12년 만의 결실이었다. 영화는 정식 개봉에 앞서 국내외 도시를 차례로 돌며 감사의 의미를 담은 ‘후원자 시사회’를 진행했다. 영화 엔딩 크레딧에는 배우와 스태프, 국내외 후원자 7만5270명의 명단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이 10분에 걸쳐 소개돼 영화의 의미를 더한다.
■고향의 품 서덕들
서덕들은 영화 전반에 걸쳐 위안부 피해자들이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고향의 품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고향의 넉넉한 품을 보여주는 서덕들은 인접한 수승대 황산고가마을과 함께 사진작가의 촬영지로 이름난 곳이다.
위천면과 접한 서덕들은 금원산과 현성산 아랫자락에 있는 면적 105㏊의 논으로 축구장 150개 규모다. 조금 넓은 것 빼고는 평범한 논배미지만, 어디나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어야 할 전봇대가 이 들녘에는 보이지 않는다. 흔한 비닐하우스도 없다. 농사용 수로 외 인공 시설물이 없는 들녘이다. 풍경을 해치는 전봇대와 전선이 없다 보니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는 물론 사진작가의 발길이 이어진다. 여기에 농법까지 친환경을 고수해 메뚜기와 우렁이 등이 자라는 청정 지역이다.
현재 모습을 지킬 수 있었던 배경은 서덕들 주민의 자부심과 열정이다. 2019년 지역 영농조합이 추진한 서덕들 농사용 창고를 막아낸 것이 단적인 사례다. 한 영농조합이 서덕들 일대에 농사용 창고 건립을 추진하자 주민은 즉각 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반대에 나섰다. 서덕들은 농림 지역으로 분류돼 창고 건립 인허가 사항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주민의 강경한 반대에 영농조합 측은 사업을 포기했다. 거창군은 명성을 잇기 위해 2015년 서덕들을 조망할 수 있는 정자와 함께 서덕공원을 조성해 관광명소로 활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