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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사랑', 힘든 파고를 이겨낼 힘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이중섭 특별전

은지화 엽서화 등 ‘국민화가’ 작품 100여 점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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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국내 미술팬을 가장 들뜨게 했던 뉴스는 단연 키아프(한국국제아트페어)와 프리즈였을 것이다. ‘세계 3대 아트페어’로 불리는 영국 프리즈(FRIEZE)가 한국에 처음으로 진출, 국내 최대 미술장터인 키아프와 함께 개최한 ‘프리즈 서울’은 기대만큼이나 대단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로스앤젤레스 뉴욕 런던 등에서 열리는 프리즈가 이번에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더 눈길을 끌었다. 7만여 명의 관람객이 몰렸고, 수천억 원어치가 팔려나갔을 정도로 행사장은 떠들썩했다.

‘투계’.
하지만 이러한 화려한 미술잔치보다 기자의 마음을 더 끈 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하는 ‘이건희 컬렉션-이중섭 특별전’이었다. 지난해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유족이 고인의 뜻에 따라 무려 2만3000점에 달하는 문화재 등 미술품을 국내 미술관과 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은 기증품 가운데 이중섭의 작품만 따로 모아 서울관에서 전시회를 연다. 기증받은 90여 점과 국립현대미술관 기소장품 10점을 모아 100여 점으로 구성된 이번 이중섭 특별전은 지난달 시작돼 내년 4월 23일까지 이어진다.

엽서화.
이중섭은 ‘국민 화가’로 불릴 정도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나 일본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와 문화학원에서 수학한 뒤 1943년 귀국해 원산에 살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 1950년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이주, 부산 경남 제주 등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의 삶은 식민지배와 전쟁을 거치면서 평생을 생활고에 시달린, 암울 그 자체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작품은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폐허와 가난, 역경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따위’ 것은 사랑의 힘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이중섭은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보면 늘 힘차면서도 따뜻하다. 전시장 입구 벽면에 쓰인 글귀부터 그 ‘사랑’이 마구 전해온다.

‘조금만 있으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펄펄 살아 숨 쉬는 새로운 생명을 내포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바람 하나만으로 살아왔다고. 이제부터는 진지하게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이들의 생활 안정과 대향의 예술 완성을 위해 오로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니 예쁘고 진실되며 나의 진정한 주인인 남덕 씨. 이 대향을 굳게 믿고 마음 편안히 힘차고 즐거운 미래만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오’. (1953년 3월 9일,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결코 굴하지 않고 소처럼 듬직한 발걸음으로… 힘을 내 그림을 그린다오. 그대의 상냥한 편지만이 내가 매일 기다리는 나의 유일한 기쁨이라오. 그대 편지를 받은 날은 평소보다 몇 배나 그림이 잘 그려진다오’.(1954년 11월 21일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이중섭이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에 보낸 편지화.
그의 사랑은 이렇듯 가족, 특히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 여사에게로 향한다. 때마침 마사코 여사의 부고가 전해진 터여서 이번 전시는 더 주목받았다. 일본 문화학원 후배였던 마사코 여사는 1945년 원산에서 이중섭과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에서 살다가 1952년 부친 별세를 계기로 일본으로 떠난 뒤 이곳에서 계속 지내오다 지난달 13일 노환으로 101세로 별세했다. 편지화인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아내를 그리는 그의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끝없이 훌륭하고… 끝없이 다정하고… 나만의 아름답고 상냥한 천사여… 더욱더 힘을 내서 더욱더 건강하게 지내줘요… 내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다섯 아이와 끈’.
‘가족과 첫눈’.
‘춤추는 가족’.
이중섭의 작품 소재는 대부분 가족과 아이다. 아이들은 엽서화 은지화 등 여러 그림의 소재로 쓰인다. ‘다섯 아이와 끈’은 거대한 끈으로 이어진 다섯 명의 아이가 화합하는 대동(大同)의 모습을 담았다. 이중섭이 제주 시절 그린 ‘가족과 첫눈’은 사람(가족)과 새, 물고기 등이 어우러져 첫눈을 즐기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1972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에서 선보인 이후 거의 전시되지 않다가 이번 기증을 통해 대중에 모습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춤추는 가족’이다. 이 그림은 네 명의 가족이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는 장면으로, 앙리 마티스의 ‘춤’에 비견될 정도로 역동적이다. 붉고 노랗고 퍼런 원색의 강렬함이 전해주는 에너지는 또 어떤가.

‘현해탄’.
‘현해탄’에서 화가는 부인과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는 이별의 상황에서도 곧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 인물은 모두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작품 속에 담긴 바람과 달리 그는 1956년 가족과 재회하지 못한 채 영양실조와 병고에 시달리다가 무연고자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그의 말년작인 ‘정릉 풍경’은 황량함을 잘 드러낸다.

은지화 ‘가족을 그리는 화가’.
은지화만을 모아놓은, 조명이 어두운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그만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은지화가 대거 등장한다. 담배 포장지인 알루미늄 속지에 그린 그림으로, 철필 못 등으로 윤곽을 그린 뒤 물감이나 먹물을 헝겊으로 문질러 선이 도드라지게 해 그림을 완성하는, 흡사 ‘상감기법’을 연상케 한다는 게 미술관 측의 설명이다. 은지화 대표작 ‘가족을 그리는 화가’는 힘든 나날에도 함께 있어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선명하다.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자집 골방에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포집 목로판에서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 담뱃값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랑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벽면에 쓰인 구상 선생의 글(‘이중섭의 인품과 예술’ ‘대향 이중섭’)에선 눈물이 핑 돈다.

‘소’.
팬데믹의 끝 무렵 기후 재해와 인플레이션, 높은 금리와 환율, 경기 침체 신호 등으로 우리 삶은 다들 힘든 터널 속에 놓였다. 하지만 제주도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아래 이중섭이 실제로 살았던 초가집을 가봤다면 다시 떠올려보라. 1평(3.3㎡) 남짓 단칸방에 살며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그렸던 화가의 집념을.

특별전은 서울에서 열리지만, 이중섭이 전하는 역경을 헤쳐나갈 힘을 느끼고 싶다면 이번 명절, 가까운 부산 동구 범일동 이중섭 거리를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그가 보여주는 힘의 대명사인 소 동상이 이 거리의 대표작이다. 서울=이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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