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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기…새로 읽는 나림 명작] <2> 이병주와 세 개의 관부연락선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 속에서 올바른 나라 만들기의 방향성 제시

  • 김성환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연구위원
  •  |   입력 : 2022-09-18 19:15:05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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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이후 한일수교 반대 운동
- 정체성 수립 위한 통찰공간 열어
- 경험 투사한 주인공 유태림 통해
- 역사 되짚으며 나아갈 길 고민

- 글 가득 채운 학병세대 자부심
- 고담준론 풀어내고도 여적 남겨
- 억울함·자신감 뭉친 심정 짐작

몇 해 전 ‘이게 나라냐’는 목소리가 거리를 메웠을 때 구호는 같아도 원하는 나라는 각기 다르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드는 의문은, 누군가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럴 만한 자격이란 게 있을까, 있다면 그 내면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이었다. 고백건대 나도 거리에서 외쳤지만 나라 만들기의 비장함은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나라 만들기에 나설 수밖에 없는 운명의 시간이 있음은 자명하다. 역사의 한복판에 뛰어든 운명 중 지식인이라는 이름의 초상을 그린다면 이병주를 빼놓을 수는 없다. ‘관부연락선’을 읽고 학병에 끌려간 동경 유학생, 혹은 엄혹한 시대에 민주주의를 사유한 문필가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산항 제1부두의 전경이다. 제1부두는 일제강점기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간 관부연락선이 들고나던 곳으로, 현재 그 역사·문화 가치를 보전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우리 근대사에서 나라 만들기의 시간은 여럿 있었다. 국운이 다한 조선을 대신할 근대국가를 만들려 했던 개화기가 첫 번째고, 식민지에서 벗어나 국민, 혹은 인민이 주인 되는 공화국을 꿈꾸었던 해방공간이 두 번째다. 둘 다 완전한 성공에 이르지 못했음을 인정한다면 또 한 번의 나라 만들기의 계절이란 아마 ‘관부연락선’이 쓰인 60년대 후반이지 싶다. 4·19와 5·16 이후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시험대에 오른 사건이 1965년 한일수교를 즈음한 한일회담 반대운동이다. 차관 3억 달러에 매국적 수교를 했다는 분노에 학생들은 거리로 나섰고, 젊은 정치인 김영삼은 배상금이 36억 달러는 돼야 한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한일수교는 돈의 크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20년 만에 돌아온 일본을 대하며 식민지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관한 우리의 역사문제가 거기 있었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국가 정체성 수립을 위한 역사적 통찰의 공간을 열었던 셈이다. 5·16 직후 필화사건으로 감옥까지 가야 했던 이병주는 거리로 나서는 대신 ‘관부연락선’을 통해 역사를 되짚으며 나라다운 나라는 어떠해야 하며, 누가 그것을 만들 수 있는지 웅변한다.

■ 그 어렵고 어지러웠던 시절

부산 중구 부평시장 풍경. 소설 ‘관부연락선’에 등장하는 장소다. 김성효 기자
‘관부연락선’은 제목 그대로 관부연락선으로 상징되는 식민지 역사를 성찰하는 소설로, 서사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는 유태림이라는 지식인의 삶이다. ‘C시’, 즉 진주 지방 유지의 자제인 유태림은 빼어난 수재였지만 항일운동에 휘말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의 대학에 진학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천재는 없지만 악인도 없다는 문학과에서 유태림은 일본인 동기들과 교우하며 문학과 철학을 논하면서도 조국의 미래에 대해 번뇌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유학생의 낭만은 이내 전화(戰禍)에 휩쓸린다. 태평양전쟁 말기 유태림은 학병에 징집되어 중국전선으로 끌려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귀국선에 올랐지만 그가 도착한 조국은 전쟁이 임박한 극심한 이념대립의 공간이었다. 고향에서 교편을 잡은 유태림은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 청년 학생을 이끄는 한편 분단의 모순을 성찰하며 나라 만들기를 위한 사상논쟁에서도 뛰어난 통찰을 보여준다. 한국전쟁의 위기 속에서도 고향의 청년을 지켜내는 지사의 풍모를 잃지 않은 그였지만, 종국에는 빨치산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됨으로써 그의 뛰어난 능력은 끝내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유태림의 삶은 그 자체로 한국 근대사의 공간이다. 작가는 자기 경험을 투사한 유태림을 통해 역사를 재현했고, 유태림의 삶의 결론으로서 나라 만들기의 깃발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 결론은 경험만으로 얻은 것은 아니다. 체험으로서 비극은 역사에 대한 성찰과 결합될 때 진정한 역사성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작품 속 작품으로 또 한 편의 ‘관부연락선’을 만들었으니, 유태림의 역사연구의 흔적을 담은 유고(遺稿) ‘관부연락선’이 그것이다. 이병주는 이 원고를 빌려 역사를 탐구한다. 매국노 송병준의 악행과 그를 주살하려다 실패하고 자결한 원주신이라는 비밀 결사의 존재가 여기 포함됐고, 불행한 역사와 더불어 정약용과 같은 선각자를 통해 발견한 민족의 가능성도 중요한 축을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를 발견하고도 유태림의 전망은 식민지라는 현실을 넘어서지 못한다. 조선 몰락의 원인 중 100에 20은 일본 탓이나 조선의 책임이 80이라는 일본인 교사의 일갈에 동의도 부정도 못 하는 것이 식민지 청년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럴수록 유태림은 실천과 행동이 아니라 사상과 논리로서 나라 만들기의 방향을 제시하는 길로 나아간다.

유태림의 언설은 관념적이라는 한계도 있지만 주인공의 지사적 자질, 그리고 소설 ‘관부연락선’의 방대한 지적 자산이라는 의의도 분명하다. 유고 ‘관부연락선’에 담긴 사론(史論)의 실증성과 논리성은 이병주 특유의 박람강기(博覽强記)의 글쓰기 이력과 맞닿은 것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세 번째 ‘관부연락선’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유태림의 동료이자 일본인 동기가 보낸 편지의 수신자인 이 선생의 시점에 있다.

이 선생은 유태림의 행적을 정리하고 유고를 독자에게 전하는 소설의 화자 역할을 한다. 이 선생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유태림의 서사를 기획한 실제 작가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목소리는 60년대 후반 상황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소설의 틀을 깨면서까지 조선인 특고(特高·특별고등경찰)와 변절자 실명을 거론한 것은 당대 이병주의 솔직한 육성이다. 특히 유태림의 유고가 한국에서는 불온의 빌미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는 60년대 말 이병주 특유의 정치 감각을 드러낸다. 작가에게는 허구의 소설만으로 다하지 못한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 학병 세대의 고뇌에서 배울 것

부산 중구 보수동에 있는 부민교 표지석. 소설 ‘관부연락선’에 등장한다. 김성효 기자
이병주는 학병세대이다. 청년기에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겪은 학병세대는 역사적 비참을 극복했다는 자부심이 압도적인 내면을 가졌다. 그런 이유로 학병세대를 ‘대한민국의 설계자’로 부를 수 있거니와, 이병주 글쓰기의 원동력 역시 그러한 자부심이다. 스스로를 ‘3류도 못 되는 4류’라고 폄하했지만, 명망가가 된 일본인 동기의 근황이나 진주 시절 제자들이 판검사, 교수로 출세한 사정을 꼼꼼히 짚는 장면에서는 자부심이 소설을 뚫고 나올 듯하다. 이에 비춰보면 “운명… 그 이름 아래서만이 사람은 죽을 수 있는 것이다”는 유태림의 마지막 말도 이병주의 자리에서 번역될 수 있겠다. 유태림의 삶이 이 선생의 서술 속에서 존재하듯, 목숨에 값하는 운명이란 그 역사를 헤쳐나온 지성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뜻일 터이다.

물론 이병주의 체험이 학병의 전부는 아니다. 일본군영을 탈출해 독립군을 찾아간 장준하 김준엽 등의 공적은 이병주에 앞선다. 또한 그의 사변(思辨)적 태도는 엘리트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민중적 역사관과는 철저하게 거리를 둔다. 한 예로 일제 말 가장 중요한 학생의거인 부산항일학생의거, 일명 ‘노다이 사건’의 경우 ‘관부연락선’에서는 그 경과만 소략하게 정리되고 소설 초점은 사건 이후 조선인의 열패감에 맞춰진다. 필화사건의 근원인 4·19가 이병주의 다른 작품에서 비중이 미약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런 사실을 따져 이병주를 평가하기는 쉽다. 그의 정치이념이 스웨덴식 민주사회주의에 가 닿는다는 진단은 명쾌하다. 그러나 ‘관부연락선’을 읽고서 기억에 남는 것은 그러한 결론이 아니다. 이병주는 유태림을 내세워 고담준론을 그렇게 풀어내고도 여적을 남기는데, 그것은 아마 억하심정과 자신만만함이 두루 뭉쳐진 어떤 심정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 내면의 풍경이 만주군 출신의 권력자를 비껴보며 나라 만들기를 생각한 이의 초상일 것이다. ‘관부연락선’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생전 만난 적 없는 작가의 눈매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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