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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기…새로 읽는 나림 명작] <11> ‘쥘부채’

잔혹했던 법에 희생된 ‘빨치산 사랑’…역사·개인 비극에 맞선 외침

  • 하태영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   입력 : 2022-11-30 19:31:48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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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알렉산드리아’‘마술사’ 등
- 나림 초기 중편 3부작 중 하나
- 빨치산 첫 등장 …‘지리산’ 뿌리
- 6·25전쟁·분단 등 근대사 질곡
- 청춘남녀 운명적 사랑 속 투영

- 1980년대 TV드라마로 방영
- 지리산 빨치산 내용 축소·삭제
- 100% 원작 영상물 제작 아쉬워

“진실로 인간은 더러운 강물과도 같다. 스스로를 더럽힘 없이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모름지기 바다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나림은 이 마지막 한 문장을 위해 ‘쥘부채’를 썼다. 이동식 모습은 고고했다. 그 가슴에 자라투스트라 외침이 메아리쳤다. 나림의 운명은 소설가·기록자였다.
경남 사천시 삼천포항의 실안동에서 마도로 들어가는 해상에서 찍은 지리산 능선 풍광. ‘쥘부채’는 이병주 지리산 문학의 출발점이란 점에서도 뜻깊다. 사진 정면(열두 시 방향)을 중심으로 희미하게 좌우로 뻗은 능선이 지리산 일대이다. 이곳은 바다에서 천왕봉을 보는 유일한 장소로 꼽힌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쥘부채’(1969〉는 ‘소설·알렉산드리아’(1965) ‘마술사’(1968)와 함께 나림 초기 중편 3부작이다. 빨치산 존재가 나림 문학에 처음 등장했다. 지리산 문학은 ‘쥘부채’로 시작됐다. 나림 작품을 압축한 소설이다. 3년 후 1972년 소설 ‘지리산’이 ‘세대‘에 연재된다. 한국형 좌익 파르티잔 집결지, 일제강점기 학병 거부 세대 저항지, 해방 후 빨치산 저항지, 나림 문학 고향이다. ‘쥘부채’는 KBS 문예극장(1980)·TV문학관(1984)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됐으나 원작 왜곡이 심했다. 지리산 빨치산 내용이 완전 생략, 대폭 축소됐다. 100% 원작을 살린 영상물이 아쉽다. 영상도시 부산은 과제를 안고 있다.

■ 지리산

신명숙(申明淑 39세. 형기 20년. 재감 17년 병사. 시체인수자 양수연-병사자의 이모부). “17년을 살았으니 1950년에 수감된 게구먼요.” “그렇지. 그러니까 나이는 스물두 살 때지.”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비상조치법 위반 죄인에게 사면이나 감형은 없지. 민주당 정권 때 꼭 한 번 있었을 뿐이야. 바로 그들은 국가의 적, 민족의 적이 아냐? 우리나라 형편으로 아직 그런 분자들에게 관대할 수 있는 여유가 없잖아?”

‘쥘부채’는 빨치산 동지 강덕기와 신명숙의 슬픈 사랑을 그린다. 국가·민족의 적이 돼 역사의 골짜기에 버려진 사랑이다.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내 문학은 골짜기를 그린다. 역사가는 나폴레옹을 기록하지만, 문학인은 장발장을 등장시키는 것이다.”(이병주, ‘문학인을 위한 변명’). 그런 소설이다. 시대사의 질곡에 침몰할 수밖에 없던 두 젊은이의 사랑과 그 원념이 화살처럼 꿰뚫고 지나간다. 이 기막힌 광경을 보는 관찰자의 눈이 있다. 이동식. ‘산하’ 해설자이며 ‘관부연락선’의 이 선생이고 ‘지리산’ 이규이다(김종회, ‘운명의 마루에 핀 사랑의 원념-쥘부채의 사상’, 출처 ’쥘부채’, 바이북스, 108면).

■ 사랑과 법사상

KBS의 TV문학관에 1984년 방영된 ‘쥘부채’ 중 한 장면.
“하이얀 눈 위에 검은 나비가 앉아 있었다. 주춤, 동식은 발길을 멈쳤다. 조그만 쥘부채였다. 길이는 7센티미터, 두께는 2센티미터. 축을 중심으로 180도 일직선이 된 부분의 길이가 14센티미터가량, 축에는 청실·홍실·검은 실로 어우른 술이 달렸다. 보면 볼수록 정교하게 만들어진 부채였다.” 신명숙이 왜 교도소에서 칫솔대로 쥘부채를 만들었고, 왜 깨알 같은 글씨로 ‘ㅅ·ㅁ·ㅅ’ ‘ㄱ·ㄷ·ㄱ’을 새겨 놓았는지 설명한다. 쥘부채는 상사(相思)의 부채다. 불행한 애인이 불행한 애인에게 보내는 사랑이다. 나림은 ‘쥘부채’를 통해 현대사 비극을 말했다. 지리산에서 희생된 많은 생명 이야기를 ‘쥘부채’처럼 펼치겠다. 나림의 체험이 담긴 염원으로 해석했다.

그 저변에 현실을 올바로 규율하지 못한 법에 대한 질정이 있다. 실정법규만을 형식논리로 재단하는 ‘개념법학’사상이 암흑시대를 지탱한다. 정당하고 합리적인 법이 아닌, 신명숙·강덕기의 사랑을 죽음으로 갈라놓은 ‘법’. 나림은 과연 그것이 무엇인가 묻는다. 해석·적용에서 성문법규의 경직에 반발한 ‘자유법학’(Freirechtslehre) 사상이 나림의 체험에 녹아 ‘ㅅ·ㅁ·ㅅ’ ‘ㄱ·ㄷ·ㄱ’으로 표현된다. 1950년대 청춘 남녀의 운명적 사랑에 투영된다.

“당신은 죽어 나비가 되고 나는 죽어 꽃이 되리라.” 동식이 쥘부채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나림은 강덕기 원소와 신명숙 원소를 한 마리 나비로, 한 떨기 꽃으로 결합했다. 쥘부채는 신명숙의, 나림의 염원이다. 염원이 자줏빛 연기가 돼 하늘에 올라가고, 다시 퍼져 대기와 섞일 것이다. 이 염원은 ‘지리산’에 등장한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문학이 가능하려면 역사 그물로 파악하지 못한 민족 슬픔을 모색하며 슬퍼해 보는 데 있다고 믿는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내 문학에 대한 신념을 지리산에 순교할 각오다.” ‘지리산’은 체험의 인간학이다.

‘쥘부채’는 역사 비극과 개인 비극을 명료하게 묘사했다. 근대사 질곡, 6·25, 분단, 비상조치법, 야만의 형벌이다. 인간 삶을 다양한 대칭 구조로 드러낸다. 복합 의식 소산이다(김종회, 앞의 책, 114면). ‘쥘부채’에 문학·예술·철학·역사관·법사상이 모두 담겼다. 쥘부채의 비극을 알게 된 동식은 말한다. “내가 살아온 세상! 이건 장난 아닌가!” 나는 이 문장을 오늘의 의미로 새겼다. 작품 속 변절한 애인 이야기는 신명숙의 사랑과 성녀의 사랑으로 대칭한다. 성녀(聖麗·性女)는 중의적이다. 신명숙 사랑은 ‘나비와 꽃’이다. ‘백화점처럼 모두 갖춘 남자’가 성녀의 사랑이다. 순수와 현실이 뒤섞인 사회에서 사랑도 법의 모순과 대비된다.

■ 죽음과 암흑

‘쥘부채’에 여러 죽음이 등장한다. 설악산에서 동사한 사람들 죽음, 강덕기와 신명숙 죽음이다. “사자(死者)는 영원히 젊다. 그럴 수밖에, 죽은 사람은 영원히 젊다.” 나림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설악에서 죽었다면 그들은 설악에서 영생을 얻은 셈이다. 설악산은 이제 젊은 영웅들 죽음을 안고도 움직이지 않고 슬퍼하지 않는다.” 이 장면을 읽으면 설악산과 지리산이 겹친다. 나림은 어떻게 설악산과 지리산을 연결하여 청춘의 숭고한 자유의지를 이토록 허망하게 묘사했을까.

유 선생은 누항에 묻혀 사는 은사다. 나림의 분신이다. 나림은 유 선생 입을 통해 괴물이 된 국가권력과 공산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뒤틀린 역사에 대한 분노는 나림 문학의 특징이다. “이용할 대로 이용해 놓고 곧 죽여버리는….” 유 선생은 신명숙 얘기를 듣고 말했다. “태백산에서, 지리산에서 대한민국 역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김일성 도당으로부터 미국 간첩 앞잡이 취급을 받았으니 불쌍한 것은 그들이다. 자네가 말한 신명숙이란 여자도 그 불쌍한 망자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괴물 같은 실정법과 역사에 대한 나림의 평가다. “서대문교도소가 장난감처럼 눈 아래 보였다. 서울의 시가가 서대문교도소를 주축으로 짜여져 있는 것이었다.” 소설은 가공의 진실이다.

■전등

“쥘부채는 바로 염원을 새긴 부채입니다. 부채가 할 일과 내가 할 일은 끝났다. 부채는 내가 가지고 갑니다. 집념은 기필코 기적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동식은 확신을 얻었다. 기록문학과 분단문학에 대한 집필 각오다. 이동식은 망령을 태운다. “휘발유를 쥘부채 위에 뿌리고 성냥을 그어댔다. 붉은 화염이 일시에 일고 자줏빛 연기가 가늘게 진동하면서 하늘로 올랐다.” 천재의 집념과 섭리 기운이 위대한 작가 탄생을 예고한 순간이다.

소설이 체험의 인간학이라면 법은 망령 깃든 인간체험에 대한 가치형량(價値衡量)이다. 그 저울은 공정·명확해야 한다. 나림은 <쥘부채>에서 ‘ㅅ·ㅁ·ㅅ’과 ‘ㄱ·ㄷ·ㄱ’에 대한 명철하고 올바른 해석을 법해석과 동격 가치로 묻는다. 동식은 그 기호에 담긴 의미를 찾아낸다. 이름이면서, 잔혹한 법에 의해 망령의 역사로 산화된 자신들 원소다. 해가 기울고 전등이 꽃피는 시기가 가장 아름답다. 승자의 뽐냄도 패자의 억울함도 노출되지 않는다. 만상이 제대로 품위와 가치로 나타날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 쥘부채를 태운 동식은 나림이다. 밤길을 걸었다.

※공동기획:국제신문·부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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