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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기…새로 읽는 나림 명작] <12> ‘별이 차가운 밤이면’

식민지 학병세대 얄궂은 삶의 서사…나림 소설기법 진수 담긴 유고작

  • 남송우 문학평론가·부경대 명예교수
  •  |   입력 : 2022-12-04 20:03:05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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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석군 최진사 핏줄 노비 박달세
- 그 적개심과 엉킨 암울한 시대사
- 일본인 대위로 중국인 방세류로
- 살아야했던 조선인의 운명 담아

- 배우 이향란과 혁명가 김산 등
- 논픽션 넘나든 색다른 소설 선봬
- 작가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 1992년 ‘민족과 문학’ 연재 중단
- 시대적 부채감도 미완으로 남아

‘별이 차가운 밤이면’은 공식적인 이병주의 마지막 작품이다. ‘민족과 문학’에 1989년 겨울호부터 시작해 1992년 봄호로 연재가 중단되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별이 차가운 밤이면’은 미완의 장편이 되었다. 이를 훗날 김윤식·김종회가 한 권의 장편집(문학의 숲, 2009)으로 엮어내었다.
옛 모습과 분위기가 남아 있는 중국 상하이의 오래된 동네 모습. 상하이는 나림 이병주 작가의 미완성 유고 작품 ‘별이 차가운 밤이면’에서 중요한 무대가 된다.
이 작품은 소위 이병주의 대표작이라 칭하는 ‘관부연락선’ ‘지리산’에 비견되는 무게감을 지닌다. 학병세대가 피해갈 수 없었던 역사적 부채감 속에서 펼쳐진 인간의 기묘한 운명과 무정한 삶이 또 다른 색채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관부연락선’의 유태림이나 ‘지리산’의 하준수와는 변별되는 ‘별이 차가운 밤이면’의 박달세의 삶은 차원이 사뭇 다르다.

박달세는 출생부터 문제적이었다. 그는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노비인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실제로는 만석군 최진사의 핏줄이다. 이 특별한 운명은 최순직이란 이름 대신 그를 박달세로 살게 한다. 어린 박달세는 최진사와 어미의 정사 장면을 목격한 ‘별이 차가운 밤’의 시린 경험과 최진사 아들 최순영에게 받은 모멸과 상처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사갈로 살아가고자 하는 운명으로 자신을 내몰아간다. 진사의 첩 노릇을 해야 했던 어미와 노비 아비의 아들로 살아야했던 박달세의 복수심이 어떻게 자기 운명을 직조해가는가가 이 작품의 전모를 구성한다.

복수심의 첫 출발은 관부연락선을 타고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 대판으로 떠나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박달세는 주경야독하며 대판고등학교에 당당히 입학하고, 독기를 품고 공부에 매진한 그는 일본 최고학부인 동경제대 법학부에 입학한다. 2학년이 되어 학도병 출진이 시작되고, 고등문관 시험도 폐지되어버린 상태에서 박달세에게 또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달세가 쓴 ‘일본에 대한 나의 태도’라는 논문으로 인연을 맺게 된 일본 경찰 간부 히라이를 통해 총독부 특고과장 쓰네요시와 만난 것이다. 박달세는 이를 계기로 학병 대신 쓰네요시의 하수인이 되는 길로 인생이 또한번 선회한다.

노비의 자식이라는 설움과 원한을 쓰네요시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해소하자 박달세에게 더는 민족이나 독립 따위는 고민의 중심축이 될 수 없었다. 조선인 학생 모임에 다녀온 뒤, ‘일본에 대한 나의 태도’를 통해 반일의 불가능성, 항일의 무모함을 논하던 박달세는 대동아공영권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이후 행로는 숨가쁘게 전개되는데, 학병 대신 쓰네요시 특고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국 상해로 건너간 박달세는 생사가 묘연한 일본군 특무장교 엔도오의 역할을 대신하는 특별한 임무를 맡게 된다. 노비 출신 조선인이 일본 동경대 법학부생이 됐다가 이제는 가짜 일본인이 되어야 했다.

이런 연유로 이중적인 삶이 시작된 박달세에게 상해의 활동은 팩션 요소가 가미돼 더욱 흥미진진한 장면들로 넘쳐난다. 그가 만난 다양한 인물, 이를테면 유명 여배우 이채란, 중국인 국책 영화사 사장 카와다, 중국어 교사 역할을 했으며 5개 국어에 능통한 임시청, 자신을 엔도우 장교로 변신시킨 야마시로 중좌 등과 함께 만들어내는 다양한 삶의 굴곡은 그 자체로 박달세의 운명이었으며, 한 편의 드라마이다. 이러한 팩션 요소의 소설 구성에 핵심 역할을 했던 자료는 야마구치 요시코의 ‘이향란, 나의 반생’이란 자서전이었다.

이채란이라는 작중인물의 모델인 이향란의 생애는 학병으로 끌려가 보초를 서면서 그의 노래를 읊조렸던 이병주에게 박달세의 운명만큼 드라마틱했을 것이다. 이채란으로 분장한 이향란은 가짜 중국인으로 살아야 했던 박달세의 운명과도 닮았기에 그녀를 이채란으로 명명해 일종의 소설적 장치를 마련해둔 셈이다.

박달세에 대한 이채란의 환대와 관심은 이방인같은 존재였던 박달세에게 상해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물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상해를 제대로 알기 위해 우찌야마 서점으로 박달세를 데리고 가서는 상해와 관련된 책들을 사주는 행위는 이병주 작가의 글쓰기 특성을 내보이는 중요 장면이다. 야마구치 요시코의 ‘이향란, 나의 반생’이 작품 구상의 한 발판이 된 것처럼, 남다른 독서를 통해 소설 쓰기에 필요한 원천적 정보를 끌어내는 이병주 작가만의 글쓰기 특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박달세가 서점에서 산 ‘상해의 역사’를 통해 상해를 이해하는 장면 역시 작품 토대가 되는 중심 내용을 작가 이병주가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는지 보여준다. 이채란이 일본으로 떠나면서 박달세에게 전해주는 영어로 된 ‘아리랑의 노래’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혁명가 김산을 다룬 작품이다.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역시 같은 방식으로 노출해 작가 자신의 사상적 편력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글쓰기 특성은 이병주 작가의 세계 인식의 한 방법이면서 다양하고 진귀한 자료를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혼용·융합해 또다른 소설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그의 기법을 잘 보여준다.

일본군 엔도오의 가면을 쓰고 상해를 누빈 박달세의 행적은 이병주 작가가 그려내고자 했던 학도병의 또 다른 유형의 모티브였다. 상해에서 박달세가 맡은 임무는 적성국가, 적성 단체 공작원의 동태를 탐지·척결하는 일이었다. 특히 일본군에 배치된 조선 출신 학도병의 불상사를 단속하는 일은 가장 긴요한 임무였다. 이 과정에서 박달세는 또 한번의 변신을 시도한다. 중국인 방세류로 사는 삶이다. 임무 수행을 위한 방책이었을 테지만, 엔도우 대위에서 중국인 방세류로의 변신은 각기 다른 인물로 얼굴을 바꾸며 살아야 할 만큼 엄혹했던 시대상황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박달세의 운명적 행로는 그의 출신에서 시작됐지만 식민지라는 시대 상황을 박달세 역시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독립투사이자 혁명가 김산(왼쪽)과 작가 님 웨일즈. 국제신문 DB
이채란의 실제 모델 이향란이나 님 웨일즈 - 에드가 스노우(두사람은 부부였다)가 작품에서 다룬 혁명가 김산과 마우쩌둥은 시대의 명암이자 상징이었다. 작중 인물의 내적 모순과 그 모순이 충돌하여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세계는 그 자체로 박달세의 기구한 운명을 대변한다. 작가 이병주는 그런 방식을 통해 작품과 작품이 그려내는 세계 속으로 안착해 들어간다.

박달세는 임무수행 중 감당하기 어려운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조선 독립을 위해 잠입한 임춘택이란 가명의 공작원을 체포하는 과정에서다. 인간으로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감시하고 체포하는 일에는 협조할 수 없다는 임시청의 대답은 박달세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달세가 애써 조선인 공작원을 도피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어렵게 실행하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일본인 엔도우, 중국인 방세류에서 다시 박달세로 돌아간 그의 내면은 이 모든 상황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일까? 체포된 공작원이 학도병 출신이었음을 알게 된 박달세는 깊은 실의에 빠지고, 정신쇠약증으로 아편의 힘을 빌려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마무리되지 못한 유고작이기에 작품 결말은 어쩔 수 없이 독자의 몫이 되었다. 종전과 해방을 맞은 박달세는 아라이상, 엔도오, 방세류라는 가짜 이름을 벗어던지고 본래의 자신으로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을까? 패전국 전범으로 처벌되지는 않았을까? 그도 아니라면 그가 사랑했던 중국인 양미운과 함께 방세류로 상해의 삶을 이어갔을까? 어떤 길로 향했든 박달세는 동족인 학도병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작가 자신이 가졌던 시대에 대한 부채감이자 작가의식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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