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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나’라는 감옥에 갇히지 말고, 사랑을 열심히 수련합시다

이해인 수녀의 계묘년 새해 메시지

  •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
  •  |   입력 : 2023-01-02 20:00:24
  •  |   본지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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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안리 성베네딕도 수녀회에
- 해인글방 둥지 튼 게 1997년
- 세상의 독자들이 보낸 편지
- 글방에 쌓여 작은 역사로

- 새해엔 국제신문 칼럼 연재로
- 독자와 더 폭넓은 소통 예정

무언가 떠오른 듯, 수녀님이 일어서며 말했다. “따라와 보셔요.” 해인글방에 딸린 작은 방에 들어서자 손 편지가 온 방에 가득했다. “편지 방이에요.” 그러고 보니 분홍 종이에 쓴 안내판이 문에 붙어 있다. ‘추억창고 편지글방 - 세월 속에 보물이 된 독자들의 옛 편지’. 시집을 읽고 정성스레 쓴 길고 긴 편지, 팬의 마음을 담은 편지, 군인의 편지, 청소년의 편지, 청년의 편지, 중년의 편지…. 요점과 보낸 사람 정보만 간추려 독서카드처럼 만든 두터운 편지카드 뭉텅이도 많이 보였다.
이해인 수녀·시인이 지난달 29일 부산 수영구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의 해인글방에서 환한 표정으로 책과 편지와 기념품을 소개하고 있다. 이원준 기자 windstorm@kookje.co.kr
액자에 담긴 편지도 있다. “† 축하합니다. 장구한 세월 귀찮게도 숱한 발길에 채이던 돌맹이가 닳코 닳아, 빛이 난다. 서울에서 엄마가 기쁜 마음으로” 1981년 수녀님이 새싹문학상을 받았을 때 어머니가 부친 편지라고 한다. 닳코 닳아, 빛이 난다, 닳코 닳아, 빛이 난다. 이 대목이 가슴에 와서 콱 박혔다. 문득 편지박물관을 만들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디지털 세계를 떠나 손 편지 아날로그 세상으로 들어선 듯한 기분에 젖을 즈음 한 가지 궁금했다. 사람들은 수녀님께 어떤 말을 듣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부칠까?

“다시 해인글방으로 갈까요?” 수녀님이 말했다. 편지 방을 나와, 역시 귀한 편지가 많이 전시된 편지 복도를 지나 글방에 다시 들어섰다. ‘현실’로 돌아왔다.


■ 편지의 방, 편지의 복도를 지나

지난달 29일 부산 수영구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안에 있는 해인글방에서 이해인 수녀·시인을 만났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 샘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인 수녀께 미리 말씀은 안 드렸지만, ‘어린 왕자’ 속 이 문장이 이번 인터뷰의 기획의도다(미리 말씀드렸다면, 아마 안 만나주셨을 거다). 사막 같은 도시에서 부대끼고 ‘닳코 닳아’ 지친 어느 날 관공서나 도서관 벽에 걸린 이해인 수녀의 시를 보고 그 맑음, 우아한 단순함, 진실과 솔직, 공부와 참회, 소박함을 느껴본 사람은 ‘샘’이란 낱말을 이해할 것이다.

1945년생 이해인 수녀는 올해 78세가 됐다.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내면서 그는 시인이 되어 우리 곁에 왔다. 47년 전인 그때나 지금이나 부산 광안리 근처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에서 산다. 많은 독자가 그의 초기 시집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내 혼에 불을 놓아’때부터 그의 시를 공책에 옮겨 쓰거나 아련한 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동봉하거나 책받침에 옮겨 쓰고 통째 코팅했을 것이다. 계묘년이 밝으면서 이해인 수녀는 수도자로 서원한 지 55년이 됐다. 그는 변함없이 광안리 바닷가에 가까운 수녀원에 살며 시민·독자와 함께한다.

“요즘 조금 분주합니다.” 1997년 수녀회 안에 해인글방을 열면서 책과 시 그리고 만남을 통해 수도자로서 본분을 다하는 ‘글방 소임’을 맡아왔다. 세월이 흘러, 해인글방도 ‘변화’를 앞두게 되면서 그는 좀 바빠진 듯했다.

■ ‘마음’을 수신하는 해인글방

1981년 어머니가 이해인 수녀에게 보낸 편지.
“그럼요. 해인글방은 열린 공간입니다. 예약만 하면 누구나 올 수 있지요. 이곳에서 간담회나 행사도 하고 손님도 많이 만납니다. 요즘 좀 더 분주해졌어요.” 해인글방이 자리한 장소와 건물은 오래됐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재건축을 준비 중인데, 해인글방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일이 끝나고 나면 해인글방은 적어도 지금 같은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해인글방에 있는 수많은 책과 편지와 자료와 기념품을 지금 조금씩 정돈·정리하고 있다.

지역문화 관점에서 보면, 해인글방은 참으로 독특하고 귀한 곳이라 수녀회 공간의 새 단장 뒤에도 알맞은 형태를 찾아 잘 간직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해인 수녀께 물었다. “요즘도 독자와 시민이 많이들 오시나요?” 그때쯤이었다. 해인글방 문을 조용히 열며 두 사람이 들어섰다. “어떻게 오셨냐”고 이해인 수녀가 묻자 두 사람은 “부산에 여행 온 길에 평소 가고 싶던 해인글방에 들렀다. 제주도에서 왔다”고 답했다. 이렇게 예약 없이 ‘불쑥’ 찾아오는 손님이 꽤 있는 듯했다.

해인글방에는 책·기념품뿐만 아니라 편지며, 여러 사연을 담았을 택배며, 자기 마음을 전하고 싶은 이들이 발신해온 사물이 참 많았다. 이해인 수녀의 바쁜 일상을 짐작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 많은 사람이 수녀님께 귀뚜라미처럼 ‘나 여기 살고 있소’ 발신하는구나.

■ 동백

‘편지 복도’에서 만난 민들레 그림 편지.
“어떤 내용이 많은가요?” 이 물음에 이해인 수녀는 답했다. “청소년부터 중장년까지, 미래·가족·초조·불안·우울·회의·신앙에 관한 고민을 꽤 보내오는 편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물음엔 솔직하게 답하죠. 저는 말을 길게 하지는 못한다고. 제가 쓴 책을 한 번 보시는 것도 도움이 될 수는 있겠다고. 저도 세상 물정은 잘 모르니 저한테서 훌륭한 답을 기대하시지는 말라고.” 이 답을 듣고는 이렇게 물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보십사 하는 뜻이 담겼는지요?”

가끔 자신의 시집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을 떠올린다고 했다. 이해인 수녀의 시 ‘동백꽃이 질 때’를 떠올렸다. “비에 젖은 동백꽃이 바다를 안고 / 종일토록 토해내는 처절한 울음소리 / 들어보셨어요? / 피 흘려도 사랑은 찬란한 것이라고 / 순간마다 외치며 꽃을 피워 냈듯이 / 이제는 온몸으로 노래하며 떨어지는 꽃잎들 /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거부하고 / 편히 살고 싶은 나의 생각들 / 쌓이고 쌓이면 죄가 될 것 같아서 / 마침내 여기 섬에 이르러 행복하네요 / 동백꽃 지고 나면 내가 그대로 / 붉게 타오르는 꽃이 되려는 / 남쪽의 동백섬에서…”

그는 암 치료를 이겨냈고 손의 뼈는 변형됐으며 다리에는 인공관절을 넣었고 통증을 달고 산다. 지난해 펴낸 책 ‘꽃잎 한 장처럼’에 그런 내용이 잘 나와 있다. 그런데 직접 만나니, 이토록 밝고 해맑은 에너지를 발산해 남에게도 힘을 주는 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 병원의 ‘일가친척’

‘해인 수녀님도 견뎠는데 나도 견뎌야지’ 하는 자극을 받는 독자들이 있는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병원에 가면, 제가 아픈 것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병원에 온 환자들이 모두 일가친척 같아요. 누구 하나 남 같지가 않고 모두 어디서 만난 사람 같고 인사하고 싶고. 이것은 반세기 넘게 수도 생활을 해서 생긴 어떤 내공 같은 것인가, 이런 생각도 해요.” 사람은 아프면 자기 아픈 것만 느낀다. 그런데 ‘해인 수녀님’은 환자가 다 일가친척 같다고, 가서 인사하고 싶다고 했다. ‘이분은 이런 엄청난 말씀도 이렇게 소박하게 하는구나’ 싶었다.

2023년 계묘년을 맞이한 독자와 시민께 새해 메시지를 부탁했다. “오늘 이 시간밖에 없는 것처럼 새롭게 고맙게 기쁘게 살아가야겠다. 한 번뿐인 이 삶을 감동과 감탄의 감각을 지니고 꽃으로 만들어야겠다. 나라는 감옥에만 갇히지 않고 사랑을 더 열심히 수련해야겠다. 그리고 동심을 간직해야겠다.” 이해인 수녀·시인은 2023년 새해 매월 셋째 금요일 국제신문에 칼럼 ‘기도의 창가에서’를 연재한다. “기도가 필요한 세상이니까요.” 수녀님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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