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편 433행 英현대문학 대표작
- 1차 세계대전 후 유럽 참상 그려
- ‘죽은 자의 매장’ 등 5부로 구성
- 첫 구절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 마지막 구절 ‘샨티 샨티 샨티’
- 읊는 순간 가슴 뜨겁게 데워져
 |
| 산타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그리스 로마)의 라파엘로 작 프레스코 ‘시빌라’. 왼쪽에서 세 번째 여인이 ‘황무지’ 제사에서 인용된 무녀다. 천사가 든 석판에 신탁 내용을 옮겨 적고 있다. |
영어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으로 시작해 산스크리트어 ‘Shantih shantih shantih’로 끝나는 433행 장시가 ‘황무지(THE WASTE LAND)’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시’라는 그 명예, 지금도 빛날까.
시집 ‘황무지’(1922년)가 발표된 지 딱 100년이 지났다. 던져볼 만한 질문이다. 게다가 연말·연초 쓱 나타나는 명품 뮤지컬 ‘캣츠’를 본 관객이라면 엘리엇을 생각했을 터이다. 키가 껑충했던 엘리엇은 애묘인이었다. 동시집을 한 권 냈다. 1939년 발간된 ‘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 초판본 표지에 고양이 그림도 직접 그려 넣었다. 그는 어린이 영세 때 대부를 서고 그 대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때 ‘고양이 시’를 한 편 곁들였다. 사회를 향해 낸 목소리를 겸했다고 한다. 성인도 애독자. 영국 뮤지컬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이 동시집을 손에 쥐고 중얼거렸다. ‘뮤지컬로 만들어야겠네’. 1981년 ‘캣츠’가 처음으로 등장해 무대를 휘저어 놓았다. ‘주머니쥐 할아버지’는 엘리엇 별명이다. 동료 시인 에즈라 파운드(1885~1972)가 붙여줬다.
‘캣츠’에 나오는 시는 팡팡 튄다. ‘황무지’는 어떨까. 첫 행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는 감성을 적시고, 마지막 행 ‘샨티 샨티 샨티(샨티는 평화라는 뜻)’는 가슴을 데워준다고 말하는 이가 많다. 처음과 끝, 두 행은 그렇다.
그 사이로 흐르는 시에 눈길을 둬 보라. 어지럽다. ‘모더니즘 시가 이런건가’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모더니즘은 20세기 서구에서 일어난 새로운 문학·예술 사조. 앞서 유행한 사상·형식 문체 따위를 갈아엎는 각축장이었다. 그런 낯설게 하기가 현대성으로 불렸다. ‘황무지’는 모더니즘 시로서 선두에 섰다. 고대 그리스어를 포함해 여러 유럽 언어로 쓰였다. 기독교 불교 힌두교에서 흘러나온 종교 언어를 불러냈다. 여기에 동서 신화·전설·문학작품을 끌어댔다. “지옥 같은 상상력”이랬다. 그 힘이 엘리엇에게 1948년 노벨문학상을 안겼다.
 |
| ‘황무지’ 3장 ‘불의 설교’에 등장하는 티레지아스. 그리스신화에서 남성과 여성을 모두 경험하는 인물이다. |
엘리엇을 모더니스트·반(反)낭만파·친(親)지성파·도시풍 시인이라 불러도 된다. ‘황무지’ 1~5부 제목만 봐도 수긍한다. 1부-‘죽은 자의 매장’ 2부-‘체스 놀이’ 3부-‘불의 설교’ 4부-‘수사(水死)’ 5부-‘천둥이 한 말’.
표제작 ‘황무지’ 외에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 ‘전주곡들’ ‘우는 처녀’가 실렸다. 이 중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1915년)가 신예.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간 엘리엇이 그곳에서 등단하도록 도운 시인인 파운드가 “영어로 쓴 첫 현대 시”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황무지’ 초고는 900행에 가까웠다. 난삽해 보였다. 이번에도 파운드가 나서 분량을 절반으로 쳐냈다. 1부 앞에 관계 글 제사(題詞)를 뒀다. 5행을 쓰는 데 사용한 언어는 4종류(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4행에 파운드 이름이 보인다. ‘For Ezra Pound/il miglior fabbro(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후행은 단테 ‘신곡(연옥 편 26장)’에 나오는 구절. 12세기 시인 아르노 다니엘에 대한 칭송이다. 빈사 상태인 시를 살려준 파운드가 얼마나 고마웠으면! ‘보다 나은 예술가’란 표현은 최상급 헌정사다.
제사 전문은 이렇다.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네는 대답했지요/죽고 싶어.’ 쿠마에 무녀는 고대 로마 오비디우스 시인이 지은 ‘변신 이야기’에 등장한다. 쿠마에는 고대 그리스 식민 도시 이름,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다. 무녀는 아폴론이 내리는 신탁을 전하는 여사제였는데 아름다웠다. 올림포스 12신 중 한 명인 아폴론이 홀딱 반해 그녀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 천 년을 살게 해 달랬다. 문제는, 젊음을 유지해 달라는 단서가 없었다. 무녀는 끝없이 늙고, 몸은 손가락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벌레처럼 조롱 안에 들어가 살게 된다. 로마 네로 황제 때 궁정시인이었던 페트로니우스가 소설 ‘사티리콘’을 쓰며 이 신화를 곁들였다. 제사 중 ‘나’는 소설 속 등장인물 트리말키오. 그는 술자리 여흥을 돋우려고 자신도 구경거리가 된 무녀를 봤다고 너스레를 떤다.
제사는 ‘황무지’가 펼쳐나가는 내용을 암시한다. 1부는 생명이 떠나, 죽음보다 못한 상태를 그려낸다. 대상은 현대 문명, 그곳 주민, 시인 자신을 포함한 현대인이다. 그런데도 사월은 생명이 용솟음치기를 요구한다. ‘가장 잔인한 달’이다.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으로 3000만 명이 넘는 인명이 죽거나 다치는 참상을 지켜봤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인류 문명이었다. ‘라일락’이 살 수 없는 불모지엔 정신이 황폐해져 새로운 삶을 바라지 않는 주민들이 산다. 1부 ‘죽은 자의 매장’에서 만나게 되는 등장인물들. ‘황무지’는 동서양 고전을 자주 인용해 배경지식이 없이 이해하기가 힘들다. 저자 주해가 빼곡하다. 1부 제목 ‘죽은 자의 매장’은 영국 정교의 매장 성사에서 따왔다.
1부 본문을 살펴보자. 성서(에스겔 전도서 이사야),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올더스 헉슬리 소설 ‘크롬 옐로’, 셰익스피어 희곡 ‘템페스트’, 보들레르의 시 ‘일곱 늙은이’, 단테 ‘지옥 편’, 존 웹스터 비극 ‘흰 악마’에서 따왔다. 마지막 행은 보들레르의 시 ‘악의 꽃’을 인용했다. 독자도 황무지에 발을 들이게 만든다.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와 같은 자 나의 형제여!’
2부 ‘체스 놀이’에선 타락한 문화와 무의미한 삶이 질펀하다. 성(性)과 생(生)을 왁자지껄 떠들지만, 생명을 못 낳으니 허무하다. 2부 인용도 거창하다. 토머스 미들턴 작 연극 ‘체스 놀이’와 ‘여자는 여자를 경계하라’, 셰익스피어 희곡 ‘앤터니와 클레오파트라’ ‘햄릿’,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 밀턴 ‘실낙원’, 오비디우스 작 ‘변신 이야기’ 중 필로멜라 얘기, 웹스터 극 ‘악마의 소송사건’을 끌어왔다. 모더니즘 기법이 춤춘다.
3부 ‘불의 설교’. 현대인 성(性)은 저속하고 무의미하다. 생명을 낳지 않고 쾌락 도구니까. 금욕주의자 부처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불러냈다. 불경 ‘마하박가’에서 부처는 “탐욕의 불을 끄라”고 가르쳤다. 엘리엇은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로 바꿨다. 아우구스티누스 ‘참회록’에서 따온 행은 ‘오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 원주(原註)에서 엘리엇은 “그리스신화에서 남녀 양성이었던 티레지아스가 관찰하는 게 사실상 이 시의 내용”이라고 말한다.
4부 ‘수사(DEATH OF WATER)’는 10행으로 짧다. 생명의 근원인 물을 제대로 사용 못 한다는 의미, 재생하기 위해 희생된 죽음을 뜻한다는 두 해석이 제시된다.
5부 ‘천둥이 한 말’. 황무지에 번개가 치고 풍요를 약속하는 비가 내린다. 천둥은 구원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황무지가 살아나려나? 마지막 두 행으로 판단해보자. 산스크리트어 주문이다. 다타(주라). 다야드밤(공감하라). 담야타(절제하라). 샨티 샨티 샨티. 아직 멀었다. 평화를 더 간구해야 한다.
‘황무지’가 영미 문단만 떠받드는 시란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매년 4월이면 떠올려 보는 시다. 433행을 다 읽지 않은들 어떠하랴. 처음과 마지막 행을 읊으면 시가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는데. ‘황무지’는 우리 마음에선 황무지가 아닌 이상한 시다. 고양이를 좋아했던 ‘주머니쥐 할아버지’ 시인을 쉽게 잊기도 힘들다. 문학이 죽고, 시가 사라져 버리는 시대가 진짜 황무지다. 0과 1이 세계를 지배하는 디지털이 언어를 영원히 추방해 버리려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시가 보여주니 고맙고 행복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