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 인문기행
- 다녀온 국내외 정원 30곳 소개
- ‘담양 소쇄원’ ‘아야 소피아’ 등
- 8개 키워드 다양한 시각서 조명
“담장 밑을 통해 흐르는 물,/ 살구나무 그늘 아래 굽이치는 물,/ 지척이라 물소리 들리는 곳에/ 분명 다섯 굽이로 흐르는구나./ 가파른 바위에 펼쳐진 계류,/ 흐르는 물이 돌을 씻어 내려오니,/ 한 바위가 온통 골짜기를 꿰뚫었구나.” 전남 담양 소쇄원을 노래한 양경지의 ‘소쇄원 30영’의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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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등졌으나 열어두었던 양산보의 기억 ‘담양, 소쇄원’. 오경아 그림. 궁리 제공 |
소쇄원은 양산보가 1530년대에 짓기 시작했고, 몇 대에 걸쳐 보완됐다. 양경지는 양산보의 후손이다. 양경지의 시에서 소쇄원의 ‘물’이 떠오른다. 소쇄원은 물소리 가득한 ‘조선 선비의 정원’이다. 조선 선비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이렇게 불린다. 복잡한 세상일에서 잠시 벗어나 소쇄원 물소리를 들으면 혼탁해진 마음이 깨끗해질 것 같다.
우리는 아파트에 살아도 단지 내 녹지공간을 원하고, 길을 걷다 나무가 있는 쉼터를 만나면 반갑고, 시간이 나면 산과 강을 찾는다. 그래야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정원에 마음이 끌리는 건 당연하다.
‘정원의 기억’은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가 들려주는 정원 인문기행이다. 저자는 ‘정원은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철학과 생활이 녹아있는 살아 있는 주거환경’이라고 말한다. 영국 에식스대학교에서 7년 동안 조경학을 공부하고 세계 최고 식물원인 영국 왕립식물원 큐가든의 인턴 정원사로 일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굵직굵직한 정원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정원의 발견’ ‘정원생활자의 열두 달’ 등 정원 문화의 저변을 넓히는 책들에 이어 ‘정원의 기억’을 냈다.
이 책은 세계 곳곳 수많은 정원 중 그들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보여주는 정원 서른 곳을 소개했다. 모두 저자가 한 번 이상 다녀온 곳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천천히 산책하는 기분이 드는 책이다. 가보았던 정원은 아는 만큼 감흥이 일어나고, 가보지 못한 정원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저자 자신이 그 순간, 그곳에서 느꼈던 기억을 좀 더 생생하게 전달하려 애썼기 때문이다. 글의 흐름도 그곳에 도착하여 걷는 동선을 따라가는 방식을 택했고, 구어체 형식으로 풀어나갔다.
서른 개 정원은 8개 키워드로 정원의 스토리와 분위기 등을 나누어,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본다. ARTS(예술과 접목된 정원들), AUTHENTIC(정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곳들), HISTORY(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정원들), IDEA(이상향을 꿈꾼 정원들), MEDITATION(지금 여기에 있음을 이야기하는 정원), PASSION(인간의 욕망과 열정이 남아 있는 정원들), PLANTS(식물 그 자체에 집중한 정원들), URBAN GREEN(도심 속 정원의 모델이 된 곳들)이다.
천재 예술가 가우디와 후원자 구엘의 추억이 남아 있는 ‘구엘 파크’, 기독교와 이슬람 두 문명의 충돌과 통합의 기억이 보관된 ‘아야 소피아’ 등 상상력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정원이 잇따라 나타난다.
외국 정원 속에서 우리 정원을 만나면 더 반갑다. 박팽년과 그 후손의 기억 ‘달성, 삼가현’, 조선 왕실 정원에 대한 깊은 사랑과 기억이 담긴 ‘창덕궁 후원’, 선비 류성룡과 성리학도들이 품었던 이상향의 기억 ‘병산서원’, 윤선도의 ‘보길도, 부용동 정원’, ‘강릉 오죽헌’, ‘담양 소쇄원’ 등. 선조의 철학과 마음이 만들어낸 우리 정원에 얽힌 이야기는 애틋하면서 아름답다.
정원은 그저 꽃·나무가 아름답기만 한 장소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남긴 기억을 만나는 공간이다. 그곳에 서면 이 세상의 시간과 함께 흘러가 버린 아련한 기억과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