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출신 배 작가 10년 만에 완성
- 1600년대 왜관 경제·정치 스캔들
- 실존 거상 임소에 얽힌 사건 다뤄

- 고증 곁들인 스토리 전개로 흥미
- 픽션 넘나들며 부산 역사성 조명
- 구수한 사투리, 읽는 재미 더해

소설가 배길남의 첫 장편 ‘두모포왜관 수사록’(함향 펴냄)은 부산의 ‘왜관’이라는, 조선 역사 속 선명한 실체를, 정면에서, 풍부하고 깊이 있게 그려낸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배 작가는 “구상 단계부터 지난달 책이 실제로 출간될 때까지 10년쯤 걸린 듯하다”고 했다. 작가가 들인 공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 10일 배길남 작가가 부산 동구 증산공원 전망대에 올라 ‘두모포왜관 수사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곳에서 ‘고관’(조선 시대 두모포왜관이 있던 자리) 일대가 잘 보였다.

“부산에서 태어나, 전경으로 복무할 때 말고는 부산을 떠나 산 적이 없는, 그래서 롯데 자이언츠 팬이 되어 한 많은 생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존경하는 인물은 야구선수 최동원일 수밖에 없는, 부산 사람”인 그는 ‘두모포왜관 수사록’를 지역 관점, 부산 감성, 변방 시선에서 철저하게 밀어붙였다. 그렇게 했더니, 이 장편소설에서는 몇 가지 특징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 특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꼽을 수 있다. ▷두모포왜관과 부산을 중심으로 당시 동아시아 역사를 새로 조명하고 그 핵심을 ‘지역’ 관점에서 꿰뚫는 서사 구축·제시 ▷폭포처럼 쏟아지는 부산말(語)의 리듬감 창조 ▷전성칠과 소삼이라는 ‘부산 기질’을 담은 매력 있는 인물. 그에 대하여 물어보기 위해 지난 10일 배길남 작가를 부산 동구 증산공원에서 만나 그 일대를 함께 걸었다. 여기서 부산 동구 ‘고관(古館)’ 일대가 잘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고관’이 바로 조선 시대 두모포왜관(1607~1678)이 70년간 있었던 곳이다.

‘수사록’답게 이 장편소설은 사건과 사고, 추적과 도피, 싸움과 승패, 음모와 의리가 번갈아 등장하면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 핵심인물 가운데 조선 시대 실존인물인 동래의 거상(巨商) 임소가 있다. “임소는 광해가 실각한 인조 1년에 동래에서 한성까지 끌려가 공개처형됐고 그 목은 저자에 전시된 사람입니다. 왜관을 통해 은화 7만 냥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증식한 상인이고 처형되기 직전까지 당당하게 거액을 제시하며 보석을 요구한 인물이죠.”

‘조선왕조실록’에 저 먼 곳 변방 소식으로 스쳐 지나가듯 짧게 나오는 이 기록을 배 작가는 부산의 시선, 동아시아의 눈으로 조명했다. “두모포왜관이 문을 열고 조선과 일본이 기유약조(1609년)를 맺으면서 각지의 산물이 두모포왜관으로 몰려들었고 일본에서 발행한 순도 8할 이상의 경장은(銀)이 두모포를 통해 조선으로 대거 유입됩니다.”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번성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된다. 물자와 자본이 모인 도시는 번성한다. 뒷날 동래상인으로 불리는 상인집단이 형성된다. ‘중앙’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상단과 도시는 더욱 성장한다.

‘두모포왜관 수사록’은 부산(동래·수영)에서 펼쳐지는 이런 변화를 추적하고 상상하면서 두모포왜관 시절의 부산은 실상 ‘동아시아의 허브’ 구실을 한 중요한 도시로 떠올랐다고 설명한다. “그냥 한적한 어촌이었다가 운이 좋아 일제강점기 때 성장하고 한국전쟁 때 잠깐 중심이 되었던 도시라는 식으로 부산을 설명하는 일부 역사학자들 모습을 보며, 기분이 좋고 안 좋고를 떠나 저건 아예 실상을 왜곡하는 주장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는 말했다.

거상 임소가 조정 관료와 대면했을 때 이런 대화와 설명이 오간 대목은 그래서 아주 중요하다. (임소) “주상의 뜻이라…. 어사 나리의 주상은 대체 누구시오?” (김병욱) “네… 네놈이 무슨…?” “김병욱은 멍해졌다. 이 자(임소)가 왜 나를 내려다볼 수 있는지 이제야 알겠어. (임소는) 이미 주상이 없는 자이다.…자, 이런 이들에게 주상은 임금이 아니라 은자(돈)이다.”(255쪽) ‘자본’의 힘과 맛을 아는 임소는 이미 왕조 시대에서 이탈해버려 다른 길로 가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두모포왜관 수사록’은 ‘부산말의 향연’도 아주 잘 보여준다. 단지 부산말을 소설 속에서 잘 부려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 ‘지역민의 심성’ ‘그곳 사람들의 정신’이 녹아 있어야 한다. “댁네들 운 좋은 줄 아소. 수영장(수영장터)서 웃 종자 거는 해 묵어도 아랫 종자 거는 건들지 말라는 소문도 못 들었나? 범 잡은 전 비장(전성칠)이 그냥 전 비장이 아인 기라. 고마 가보소.”(71쪽) “하이튼 간에 포기를 모린다, 포기를….”(69쪽) “직이라! 대신에 이 자슥(임소)도 내 손에 죽는 기다.”(175쪽)

이런 흐름은 자연스럽게 주인공 전성칠과 소삼이라는 매력 높은 캐릭터의 활약으로 이어진다. 전성칠과 소삼은 임진왜란 울산성 전투에도 참여하는 등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진한 우정을 나눈 사이다. 비장 출신의 무사 전성칠을 소삼은 당시의 표현 그대로 ‘언니’라 부른다. 소삼의 매력도 만만찮다. 신분은 하찮고 따따부따 말이 많아 실속 없는 사람 같지만, 알고 보면 지혜롭고 의리 있고 배포도 크다. 민중의 생명력과 유머 감각을 소삼은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