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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62> 데카메론-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

처녀 탐한 수도사, 스와핑…인간본성 발가벗긴 100편의 에피소드

  • 서부국 서평가·‘고전식탁’ 저자
  •  |   입력 : 2023-03-30 19:42:23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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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후대 화가들은 데카메론을 읽고 그림을 쏟아냈다. 나체 여인이 기사에게 죽임당하고 시신을 맹견이 뜯어먹어도 다시 살아나 도망치다 다시 죽는 게 무한 반복된다. 여성은 생전에 구애하는 기사를 매몰차게 거부해 그가 자살하자 기뻐하다 죽임을 당한 후 저주받는 혼령이 됐다. 다섯째 날 여덟째 이야기다. 젊은 귀족 나스타지오는 자신을 퇴짜 놓는 귀족 딸을 초청해 이 현장을 보여준다. 그녀는 충격받아 시집온다. 산드로 보티첼리 작(1487년).)


- 흑사병 피해 은신한 남녀 10명
- 별장에서 벌어진 질펀한 이야기
- 타락한 군주·성직자·상류층 등
- 다양한 소재로 중세 민낯 고발

- “저속,허튼소리” 논란됐던 작품
- 인문주의적 집필 첫 근대 소설
- 후대 문학·미술에 큰 영향 끼쳐

코로나바이러스 기세가 꺾여 세계인은 한시름 놓았다. 1348년 여름 이탈리아 피렌체는 사정이 달랐다. 무시무시한 흑사병이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날씨 맑은 화요일 아침,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속속 일곱 부인이 모여들었다. 친척 혹은 지인 간이다. 장례가 잇달아 아예 상복 차림새. 18~27세 귀족 여성들이라 한결같이 우아하다.

이 고전 도입부 풍경인데, 배경은 사실이다. 실제로 1348년 흑사병이 피렌체를 휩쓸었고,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은 현존 건물. 까마득한 14세기에 나온 장편소설 ‘데카메론’(Decameron, 1353년)은 ‘열흘간 이야기’라는 뜻. 유럽 첫 근대 소설이다.

■ 인간 본성 들추는 100개의 이야기

후대 문학·미술에 큰 영향을 줬다. 영국 작가 제프리 초서가 쓴 ‘캔터베리 이야기’가 그중 하나. 문학 변천사에서도 눈길을 받는다. 중세 종교 권위에서 벗어나 인간성이란 가치를 찾고 문화 예술에 우위를 두는 인문(인본)주의에서 태어난 작품이므로. 이탈리아 문예부흥기(르네상스)를 인문주의가 이끌었다. 세 주역이 보카치오, 단테(1265~1321), 페트라르카(1304~1374). 이들 문인 덕분에 초기 이탈리아 문학이 빛났다. 단테 ‘신곡(神曲)’에 견줘 보카치오 ‘데카메론’은 ‘인곡(人曲)’. 세 거장 중 풍자 익살 재미를 내세워 대중을 파고드는 힘은 보카치오가 가장 셌다.

데카메론 도입부로 돌아가 보자. 일곱 부인 이름은 팜피네아 피암메타 필로메나 에밀리아 라우레타 네이필레 엘리사다. 흑사병에서 살아남았다. 그 행운에 감사하며, 비탄과 부도덕으로 아수라장이 된 피렌체 시내를 떠나 근교 피에솔레(실제 지명) 별장에 수일 머물자는 데 뜻을 모았다. 한적한 곳이니 흑사병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얘기하다 보니 든든한 남정네가 동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때 청년 셋이 나타난다. 판필로 필로스트라토 디오네오다. 이들은 부인들이 합류를 요청하자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튿날 남녀 10명은 하인을 거느리고 근교 별장에 닿았다. 맏언니인 팜피네아가 자연스레 좌장이 되었다. “자, 신사 숙녀 여러분, 이 더운 날을 어떻게 보낼까요?” 오후 3시에 열어 저녁께 끝나는 이야기 모임을 꾸리기로 만장일치. 하루에 10명이 이야기를 한 편씩 하는 모임이다. 사회자인 좌장은 돌아가며 맡는데 머리에 월계관을 쓴다. 예의 바르면서 일사불란한 모임이다. 피난 온, 아수라장인 피렌체와는 정반대.

데카메론 화자인 남녀 10명이 피렌체 근교 별장으로 떠나기 전 노벨라 성당에 모였다. ‘7명 숙녀와 3명 신사, 피난 모의’ 브뤼헤 마스터 작(1482년).
남녀 10명이 별장에 머문 기간은 2주지만, 얘기 모임을 한 날은 모두 열흘. 그리스도 수난일인 금요일과 주일을 앞둔 휴식일인 토요일, 4일은 쉬었다. 총 100편 얘기가 나왔다. 당시 이탈리아가 어땠는지, 사람들이 무슨 생각 하고 어찌 행동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첫째 날 주제는 없었는데 얘길 하다 보니 ‘재치나 기발한 꾀로 곤경을 벗어난 사례’가 많았다. 악한이 죽을 때까지 잘사는 경우를 보면 부아가 치밀지 않는가. ‘차펠레토’라는 극악무도한 남자가 딱 그랬다. 죽을 때도 사기를 쳐 무덤에 묻히기도 전에 성자로 추앙받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임종 시 순결한 교인인 척 거짓 고해성사해 고지식한 신부를 감쪽같이 속였다. 이야기한 이는 “이런 일을 허용하는 하느님이야말로 얼마나 관대한 분이신가” 하며 너스레를 떤다. 여자 밝히는 젊은 수도사도 벌 받지 않는다. 그는 예쁜 시골 처녀를 꾀어 자기 방에서 사랑을 나누다 수도원장에 들켰다. 젊은 수도사가 위기를 넘기는 허 찌르는 기지가 이 얘기를 살려준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떠돌던 얘기와 보카치오 창작이 섞였다. 본능에 충실한 남녀가 얘기를 차지게 만든다. 성령을 감동케 하는 수도원장과 속이 시커먼 수도원장, 둘 중 누가 더 독자 시선을 끌까. 용감무쌍한 군주와 신하 아내에게 치근대다 무안당하는 군주 중 어느 쪽이 더 기억에 남을지 보카치오는 알았다. 데카메론, 인성이란 심연에 내려가 읽는 고전이다. 그곳에서 독자는 가끔 제 발이 저리다. 인간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읽으면 데카메론은 고전이 아니다.

■ 긴 얘기 끝 돌아보는 삶의 태도

별장에 도착한 남녀들이 야외에 자유롭게 앉아 이야기 모임을 하고 있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작’(1916년).
둘째 날부터는 전날 정한 주제를 따른다. ‘괴로움을 겪다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사람들’ 얘기다. 이렇게 데카메론은 짧은 100편 얘기와 10편 발라드(매일 모임이 끝난 후 부른 칸초네의 가사)를 질서정연하게 들려준다. 이야기 화수분이다. 셋째 날 주제는 ‘바랐던 걸 얻거나 잃은 걸 되찾은 사람들 얘기’. 성욕 강한 남녀가 벌이는 유희가 걸쭉하다. 이 고전이 외설스럽다는 손가락질 받는데 이 셋째 날 얘기가 그렇다. 열 번째 편도 도긴개긴이다. 몸에 붙은 툭 튀어나온 ‘악마’ 탓에 고통 겪는 수도사 루스티코는 14세 소녀 알리베크가 가진 ‘지옥’을 방문해 목적을 이루지만 나중엔 오히려 소녀를 피하게 된다는 내용.

출간하자 입방아에 올랐다. ‘소스를 만들어 내는 양념절구’가 무슨 뜻인지 알곤 얼굴을 붉히는 독자가 많았다. ‘키스를 받은 입술은 색이 바래지기는커녕 달처럼 새롭게 빛난다’ ‘이빨을 몽땅 뽑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입을 벌려 웃어대는 귀부인들’ 같은 표현. “저속하다, 허튼소리다”는 항의가 나왔다. 보카치오는 이런 화살이 날아올 걸 알았다. 책 끝 맺는말이다. “썩은 마음을 지닌 사람은 결코 건강한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겐 정숙한 말이 소용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숙하지 못한 말도 건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해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쁜 자극은 피하고 재미난 데만 읽으라는 주장인데 글쎄다. 보카치오는 말초신경을 간질이는 얘기를 더 감질나게 써놓았다.

넷째 날은 불우한 연인이 비참하게 결말을 맞는 9편이 이어진다. 마지막 한 편은 비극이 아니었다. 알콩달콩 연애 소동을 들려줘 가라앉은 좌중 분위기를 띄웠다. 다섯째 날은 전날과 반대로 극심한 고통을 겪은 후 행복을 얻은 남녀 얘기가 나왔다.

촌철 살인하는 경구(警句)가 짜릿하다. 여섯째 날 주제. “경구란 본질적으로 양이 사람을 무는 것처럼 해야지, 개처럼 물어뜯어선 안 된다. 그리되면 욕설이다.” 타인에게 선의로 쓴소리하기도 힘들고,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말. 일곱째 날은 몸이 뜨거운 부인들이 남편을 속이고 연인과 재미를 보다가 발각되었거나 들킬 위기에 놓였을 때 빠져나간 계교를 다뤘다. 부인이 남편을 속이는 전날 얘기는 맛보기였나. 여덟째 날은 속임수에다 골탕 먹이기, 앙갚음 같은 기행을 다룬 고강도 얘기가 쏟아졌다. 여덟째 날 얘기엔 남편과 아내를 잠자리에서 공유하는 부부 두 쌍이 나온다. 현대어로 ‘스와핑’이다. 아홉째 날은 재미난 남녀 줄다리기가 소재. 엉큼한 잔니 신부가 친구 피에트로와 결혼한 젊고 예쁜 여인을 농락하는 얘기는 야하면서 웃음을 일으킨다.

마지막 열째 날 주제는 ‘관용’. “태양이 하늘의 아름다움이며 장식인 것처럼, 인간의 관용이란 각자의 덕이 내뿜는 광채다.” 고아한 문구다. 보카치오는 일부러 이 주제를 마지막에 배치한 듯하다. 전날까지 얘기로 뜨거워진 체온을 떨구고, 이렇게 긴 얘기를 해온 저의를 밝힐 준비를 한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들 남녀 10명은 물론 독자도 생각해 보는 시간을 맞는다. 보카치오 역할은 인간 안팎을 두루 보여주는 데까지, 판단은 독자 몫이다.

이탈리아 초기 인문주의자인 보카치오가 쓴 이 첫 근대 소설을 너무 정색해서 대할 필요는 없겠다. 화장하지 않은 인간 본성이 어떤 모습이며, 그런 남심·여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은 분명히 도움을 준다. 그럴 때 데카메론은 뻣뻣한 인간 본성을 유연하게 만드는 요가 교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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