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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63> 갈매기/바냐 삼촌/세 자매/벚나무 동산-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1860~1904)

대화보다 독백, 적극적 음향 활용 … 파격으로 근대 연극판 뒤엎다

  • 서부국 서평가·‘고전식탁’ 저자
  •  |   입력 : 2023-04-13 19:27:54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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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로 첫 무대 ‘갈매기’ 초연
- 전에 없던 낯선 연출로 대실패
- 포기하지 않고 2년 뒤 재도전
- 극중극 실험 등 연극 혁신 역설

- 그의 마지막 작품 ‘벚나무 동산’
- 등장인물 없는 ‘빈 무대’ 마무리
- 콧대 높은 英 비평가 찬사 갈채

수평선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다가가 보면 거친 파도가 넘실댄다. 삶과 닮았다. 찰리 채플린(1889~1977) 말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죠.” 원자 세계라 해서 다르랴.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1901~1976)는 그 정경을 ‘불확정성 원리’에 담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게 삶이다. 무대 위에 올려놓고 보면 이해되려나 해서 그리스인들은 원형극장을 찾았다. 현대인도 그 행렬에 합류한다. 연극에 대한 향수는 뿌리가 깊다.
성공한 극작가와 그를 존경하는 연극배우를 둘러싼 따듯한 유대감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안톤 체호프가 모스크바예술극장 단원들이 경청하는 가운데 ‘갈매기’를 낭독하고 있다.
무대로 관객을 유혹하는 이를 극작가라 부른다. 러시아 극작가 체호프는 연극 문외한도 아는 이름. 다른 재능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기 드 모파상, 에드거 앨런 포와 더불어 세계 3대 단편 소설 작가. ‘귀여운 여인’ ‘어느 관리의 죽음’ ‘쉿!’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포함해 중·단편 800여 편을 썼다.

■실패 후 더 높게 날아오른 ‘갈매기’

극작가로서 체호프가 얻은 명성은 “현대 연극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로 요약된다. 근대 연극판을 뒤엎었다는 얘기다. 세인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파격이었다. 첫째, 전에 없던 밋밋한 연극이었다. 사건과 행동을 극적으로 표출하는 관행에서 벗어났다. 사건·행동이 미적지근하니 무대 연출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둘째, 대화보다 독백이 많았다. 이 역시 새로운 시도. 체호프는 등장인물 내면에 소용돌이치는 갈등 좌절 환희 같은 심리나 생각을 최대한 많이 관객에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셋째, 극 중 표현이 색달랐다. 음향이 제2 언어. 관객은 야경꾼이 내는 딱따기 소리, 도끼로 나무 찍는 소리를 들으며 그 의미와 장면을 생생히 머릿속에서 그렸다.

지금이야 익숙한 얘기지만 당시엔 낯설거나 엉터리로 보였다. 반면 관객이 호응을 보인 면도 없지 않았다. 관객이 연극에 친근감을 느끼도록 사실주의(리얼리즘) 극본을 써냈다. 이렇게 해서 단막극 10편, 장막극 7편이 나왔다. 장막극 중 ‘플라토노프’(1881년) ‘이바노프’(1889년) ‘숲의 정령’(1890년) 이후 나온 ‘갈매기’(1896년) ‘바냐 삼촌’(1897년) ‘세 자매’(1901년) ‘벚나무 동산’(1904년)이 체호프 4대 희곡.

연극에서 등장인물 간 관계는 흘러가는 강물 같다. 관객은 나름 그 흐름을 예상한다. 그게 연극 보는 재미 중 하나. 하지만 반전이 주는 감동에 비할 바가 아니다. 1896년 10월 체호프는 그런 반전으로 갈채를 끌어낼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연극 한 편을 들고 나섰다. 바로 4막극 ‘갈매기’. 선택한 공연장은 러시아 내 최고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하지만 야심만만하게 시작한 ‘갈매기’ 초연은 대실패로 끝났다. 연극은 엉뚱하게 소극(笑劇)으로 흘러갔다. 체호프는 보다 못해 공연 중간에 나가 버렸다.

당시 초연 ‘갈매기’는 어땠는가. 주인공이 권총 자살한 이 비극을 지나가는 말로 슬쩍 언급하는가 싶더니 연극이 끝나 버렸다. 황당해하는 관객들. 마지막 장면 극본이 이렇다. “(목소리를 죽여서 낮은 톤으로) 이리나 니콜라예브나 아르카디나를 어디 다른 데로 좀 데려가 주세요. 그게, 콘스탄틴 가브릴로비치 트레플레프가 자살했습니다.” 옆방에서 막 자살한 아들(트레플레프)을 어머니(아르카디나)가 보게 해선 안 된다는 대사. 기존 연극이라면 아들이 자살한 현장으로 어머니가 달려와 절규하는 게 정석. 트레플레프는 그전에도 자살에 실패했는데 이 사건도 부각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사건과 행동의 부재’다. ‘바냐 삼촌’ ‘세 자매’ ‘벚나무 동산’에서도 딱히 엄청난 비극이나 위기랄 게 없다.

초연 후 실패로 날개가 꺾인 ‘갈매기’는 바다로 추락했을까. 어느새 다시 날아올랐다.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격려를 멈추지 않았다. 힘을 낸 체호프는 2년 뒤인 1898년 모스크바예술극장 무대에 ‘갈매기’를 다시 올렸다. 2시간 후 막이 내려갔다. 이번엔 환호성, 그것도 극장 가득.
체호프는 요양차 독일 남부 바덴바일러 ‘서머호텔’에 묵었다가 1904년 7월 2일 숨졌다. 객실 바깥 벽면에는 명판, 발코니 난간에는 ‘1904년 7월에 안톤 체호프가 이곳에 머물다’고 쓴 명판이 달렸다. 대표작 중 하나인 ‘갈매기’를 기념해 갈매기 조형물이 오른쪽에 보인다.
■연극 혁신 역설… 현대기법 실험의 장

고전이 된 ‘갈매기’, 러시아 시골 영지 내 호숫가가 배경이다. 그곳 으리으리한 저택에 한물간 여배우 니콜라예브나가 휴식차 왔다. 퇴직 관료인 오라버니가 소유한 이 집에서 극작가를 꿈꾸는 아들 트레플레프와 함께 지내게 됐다. 그녀는 연하 애인인 소설가(트리고린)를 아끼지만, 아들은 그가 눈엣가시다. 짝사랑하는 처녀 니나를 소설가가 가로채려 하니까. 상당한 갈등 구도인데도 큰 사건이나 충돌이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평범한 일상이 흐른다. 등장인물들은 되레 유쾌·단순해 보인다. 이때, 체호프는 등장인물에 풋라이트를 갖다 댄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던 내면이 드러난다. 관객이 진실과 마주하는 시간. 거기서 다가오는 건 삶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다. 체호프는 ‘갈매기’에 ‘4막의 희극’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 관객은 눈시울이 뜨겁다.

당시 ‘갈매기’는 극중극 같은 현대 기법을 실험하는 장이었다. 저자는 주인공을 통해 연극 혁신을 역설한다. 기존 연극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트레플레프가 그 역을 맡았다. “새로운 형식이 필요해요. 새로운 형식이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편이 나아요.” 기성 연극인인 어머니는 아들 주장을 “데카당”이라며 코웃음 친다. 극 중 이들 모자 대립은 당시 세평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체호프는 셰익스피어마저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보인다. “저기 진정한 천재가 오시는구나. 마치 햄릿처럼 책까지 읽으며 걸어가시네.” T.S. 엘리엇(‘황무지’)이나 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체호프는 ‘갈매기’에 서양 연극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몽땅 넣을 기세였다.

극 중에서 갈매기는 주인공들의 분신이다. 트레플레프는 호숫가에서 사냥한 갈매기를 나나에게 준다. 그는 마지막에 자신을 총으로 쏜다. 나나는 자신은 갈매기, 곧 희망이라고 말한다. 배우가 되려는 꿈을 향해 날아가는 갈매기. 그녀 순정을 빨아먹곤 걷어차는 소설가 트리고린은 나나가 준 갈매기를 박제한다. 그는 변화를 거부하는 안주형 인간이다.

■콧대 높은 英 비평가 찬사 한몸에

‘바냐 삼촌’은 소심하고 빈껍데기인 교수를 평생 떠받들고 살아온 가족을 보여준다. 자기 삶을 살지 못하고 초라해진 자신을 보곤 절망하는 이 세상 숱한 ‘바냐 삼촌’을 위로하는 연극. 대비되는 인물은 공공 의료에 헌신하는 데 살아가는 의미를 둔 의사 아스트로프다. 인류가 미래를 위해 숲을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환경론자. 사실상 체호프 주장이다.

‘세 자매’는 새장 같은 일상을 끝내 탈출 못하는 절망을 얘기한다. 올가·마샤·이리나는 모스크바 출신. 이곳 시골에 장군인 아버지를 따라 1년 전 왔다. 이들은 모스크바로 귀향하는 꿈을 꾸지만, 아버지는 별세하고 여건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관객은 묻는다. “삶이여,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벚나무 동산’은 이별을 다뤘다. 4막 희곡으로 저자가 44세로 숨지기 9개월 전에 썼다. 의사인 저자는 이게 마지막 작품임을 알았다. 그는 이 연극을 통해 관객에게 작별 인사를 보낸다. 지주인 여주인공 류바가 벚나무 동산이 자랑거리인 영지를 팔아 빚잔치하고 빈손으로 파리로 떠나듯. 4막 마지막은 명장면이다. 무대가 등장인물 없이 텅 비고 멀어지는 마차 소리만 들린다. 그 소리마저 잦아들면 마지막 인물이 나온다. 노약한 집사 피르스다. 그는 중얼거리고 멀리서 벚나무에 도끼질하는 소리만 들려오면서 막이 내린다. 그 유명한 ‘빈 무대’ 기법. 콧대 높은 영국 연극비평가들이 일제히 찬사를 보냈다.

1인 가구가 가파르게 느는 시대다. 현대인은 인생이라는 창공을 날아다니는 홀로 된 갈매기 같다. 체호프 희곡이 그 갈매기들에게 들려주는 대사 하나. “어쩌겠어요, 살아내야지요.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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