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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인 듯 바다인 듯 꿈틀댄다…켜켜이 쌓인 섬유의 생명력

유명균 작가 ‘더 히스토리 오브…’

  • 최승희 기자 shchoi@kookje.co.kr
  •  |   입력 : 2023-05-16 19:11:55
  •  |   본지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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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대륙 대자연에서 깨달은 영감
- 섬유 뭉치로 태초의 시공간 재현
- 내달 17일까지 수영 갤러리이배

초록빛 머금은 이끼가 바닥을 기면서 번지듯 얽히고설킨 섬유 뭉치가 캔버스를 뒤덮는다. 복잡하게 뒤섞인 섬세한 섬유들 아래에선 보이지 않는 생명력이 꿈틀대는 듯하다. 가느다란 선이 리듬감 있게 얽히면서 화면 가득 뿜어내는 원초적 에너지는 우리를 태초의 시간과 공간으로 데려가기에 충분하다. 압도적 작품의 규모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숭고함마저 느끼게 한다.
유명균 작가의 ‘더 히스토리 오브 포레스트(The History of Forest)’. 갤러리이배 제공
유명균 작가의 ‘더 히스토리 오브 포레스트(The History of Forest)’ 연작은 색에 따라 대자연의 숲처럼 보이기도, 땅 속 깊숙이 뻗어나가는 나무의 뿌리나 광막한 바다의 파도처럼도 보인다. 독특한 마티에르가 빚어내는 그림자는 하나의 조형요소로 생명력을 더한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유명균 작가가 자신의 작품 앞에서 작업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최승희 기자
“우주의 시간 속 인간은 미약하고 찰나적 존재”라고 말하는 작가는 인간 중심의 존재 방식에서 벗어나, 자연 속 한 개체로서 순수한 자연의 울림에만 집중한다.

자연을 닮으려는 작업들은 대자연 속 유목민처럼 떠돈 작가의 지난 시간에서 비롯됐다. 그는 미국에서 지낸 10여 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떠돌이로 살았다. 작가로서 잃어버린 길을 찾기 위해 뉴욕에 진출했지만 그 꿈도 잠시, 여러 사정이 겹치면서 생존을 위해선 전국의 파운데이션 프로그램을 찾아 전전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더 큰 문제는 갈 곳을 정하지 못하거나 시기가 맞지 않아 생기는 공백기. 그럴 때마다 작가는 광활한 국립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나만큼 미국 국립공원을 많이 다닌 사람도 드물 것”이라고 얘기하는 작가는 미국을 종으로 횡으로, 매년 수개의 국립·주립공원에서 10년 가까이 생활했다. 막막한 대자연에서 생존방법을 터득한 그는 푸른 숲과 붉은 노을, 밤 하늘의 별과 함께 자연스럽게 자연의 일부가 됐다. 곰을 3번이나 만나고 짐승에 둘러싸이기도 했지만 공격당한 적은 없었단다.

미국의 많은 지역을 여행하면서 각 주(州)의 다른 자연 환경과 지질학적 풍경은 많은 영감을 줬다. 지금 작업은 조지아주의 한 신비스러운 숲을 만나며 시작됐다. “숲이 묘하더라고요. 발밑을 봤더니 땅에 돌은 하나도 없고 마치 재가 쌓인 것 같았어요. 발이 푹푹 꺼지는데 신기해서 흙을 좀 담아왔죠. 그때부터 흙을 채집했어요. 땅덩어리가 커서 지역마다 흙의 색과 질감이 많이 달랐어요. 엄청난 행성의 역사죠. 우주의 역사,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까지 상상이 펼쳐지더군요.”

자연사박물관에서 느낀 인간의 미약함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 “지구의 무한한 시간 속에서 인류는 정말 찰나 같은 존재였어요. 곧 사라질 것 같은 위기감마저 엄습했죠. 그러다 수억 년 쌓인 지층을 봤는데 진지하게 와닿더라고요. 이걸 해야겠다 생각한거죠.” 다양하게 채집한 흙에서 시작된 작가의 ‘자연’은 이리저리 얽힌 섬유에 특유의 질감을 살려 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행성의 시간이 쌓인 지질의 느낌을 재현하고자 한다.

염색한 섬유 뭉치를 캔버스에 쌓으면서 그 위에 아크릴미디움과 특유의 양감을 살리는 재료를 섞어 올리며 작업하는그는 평소 12시간 이상 작업실에서 지낼 정도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작업에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투입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는 작가는 “내가 느낀 자연의 감동을 극대화할 수 있는 마티에르를 찾고 있다. 지금은 흙과 바위, 토양의 질감을 구현하려고 실험 중”이라고 했다.

작가는 몇 해 전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든 파운데이션 프로그램이 문을 닫으면서 귀국했다. 그동안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진 않았는지, 팬데믹이 끝나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물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했어요. 경제적 이유 등으로 작업을 어렵게 다시 시작했거든요. 지금은 작업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다시 뉴욕에 진출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요. 그땐 단단히 준비해서 가야겠죠.” 유명균 작가의 작품은 다음 달 17일까지 부산 수영구 갤러리이배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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