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작아도 인재는 풍성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새 나라가 들어선 격변기를 더욱 달군 주역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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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탑골공원 원각사지 대원각사비(종로구 종로2가). 1447년(성종 2) 김수온 성임이 앞쪽 비문을 짓고 썼다. |
용재는 괴애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육경 제자백가 역사서 불경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과 필치가 빼어났다며 이 고전에 여러 번 등장시켰다. 책을 낱장으로 찢어 외우는 괴벽이 있어서 그가 빌려간 책은 영영 주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괴애는 그렇게 연마한 글솜씨로 10명이 동시에 시문을 청해도 막힘없이 문장을 지었다. 출중한 필력에 명나라 사신 진감이 탄복하는 장면이 4권에 나온다.
양평 이양생(李陽生, 1423~1488)은 서자로 태어났다. 어릴 때 짚신을 만들어 내다 팔아 살았다. 글을 못 읽었으나 무예가 뛰어나 이시애 역모를 제압하는 공을 세웠다. 그 후 공신이 되고 계성군에 봉해졌지만, 우쭐하지 않았다. 추녀였고 자식을 못 낳았던 부인을 끝까지 아꼈다. 모든 지인을 깍듯이 대해 대인이라는 존경을 받았다.
백귀린(白貴麟)은 의술이 뛰어나 그에게 환자가 몰렸다. 치료비가 공짜였다. 병자가 부르면 찾아가 정성껏 돌봤다. 정작 본인은 가난해 의식(衣食)을 겨우 이어갔다. 중국 사신이 관청에서 남루한 그를 보고 물었다. “저 관원은 왜 저렇게 해진 관복을 입고 있는가요?” 통역사가 “그는 치료비를 받지 않으니 환자들도 돈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술집 찾기를 즐기다 보니 의관이 저렇습니다”고 답했다. 중국 사신이 안색을 바로 잡으며 존경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