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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67> 용재총화-성현(1439~1504)

조선의 이야기 보따리… 귀신괴담부터 당시 갑질·학폭사건까지 망라

  • 서부국 서평가·‘고전식탁’ 저자
  •  |   입력 : 2023-06-08 19:11:44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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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실·풍속·전설·길흉화복·외교…
- 다양한 소재의 글로 시대상 반영

- 당대 문장가에 냉정한 평가 눈길
- 물맛 으뜸인 전국 취수원 소개도

- 관료이자 학자·예인이었던 저자
- 음악가로 악학궤범도 공동편찬

- 권력욕 없어 독서·여행 등 즐겨
- 갑자사화 엮여 부관참시 능욕도

“나는 젊은 나이에 급제해 벼슬이 육조 판서에 오르고, 밤낮으로 노래하며 연주하는 속에 살고 있으니 어찌 이렇듯 홀로 태평 시대의 즐거움을 누리는가!”

이판사판 당쟁이 이어진 조선 시대에 이렇게 행복해하는 판서 대감이 있었다니. 선뜻 믿기지 않는다. 목숨 내놓았던 정치판에서 슬쩍 빠져나와 인생을 즐긴 성현(成俔)이 주인공이다. 조선 시대 음악 이론서인 악학궤범을 공동 편찬한 이, 호가 용재(慵齋)다.
용재총화는 조선 사대부가 매사냥을 즐기는 대목을 여러 번 보여준다. 매 주인으로 매를 부리고 사냥을 지휘하는 수할치, 사냥감이 숨은 숲을 뒤집는 털이꾼, 사냥감이 도망친 방향을 알려주는 배꾼이 한 조다. 조선 말기 풍속 화가인 기산 김준근 작 ‘매사냥’(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권력 멀리하고 학문·음악에 조예

세종~연산군 시절, 잘나갔던 관료·학자·예인이었다. 개국 공신 가문(창녕 성씨) 출신이었지만,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학문·음악에 관심을 두고, 독서·여행을 즐겼다. 시대를 잘 만난 행운에 재능이 겹쳤다. 23세인 1462년(세조 8) 급제해 일찌감치 외교관직(승문원)으로 벼슬길에 들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길 네 번, 예문관·춘추관·홍문관에 근무하며 대제학(문형)을 거쳤다. 예조판서에 장악원(掌樂院) 수장인 제조를 겸직해 맡아 나라 음악을 이끌었다.

사후에도 명성이 빛났을까? 그는 늘 “만사는 성하면 반드시 쇠한다”했는데 자기 미래를 내다본 말이었다. 1504년 1월 죽은 지 몇 개월 안 돼 갑자사화(연산군이 죽은 생모 폐비 윤씨를 복위하면서 빚어진 정치 격변)에 엮여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능욕을 봤다. 중종반정 때에야 명예가 회복돼 의정부좌찬성에 추증 후 문대란 시호를 받았다. 태조~영조 때 청백리 명단인 ‘청선고’에도 이름이 올랐다.

용재총화(慵齋叢話·사진)란 책 이름을 풀어보면 ‘용재가 엮은 이야기 모음집’. 잡록필기(雜錄筆記, 여러 소재를 자유롭게 쓴 글)다. 10권까지 320여 편으로 1504년 저술이 끝났고 간행은 사후. 용재 사후 21년 만인 1525년(중종 20) 경주 부윤 황필(1464~1526)이 3권 3책으로 펴냈다.

저자는 황필이 급제한 과거에서 시험관이었다. 당시 급제자는 자신을 뽑아준 시험관을 좌장이라 부르며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이런 인연인지라 황필은 성현 아들이자 관찰사였던 성세창이 용재총화 간행을 부탁하자 흔쾌히 승낙한 뒤 발문을 써 이 같은 사정을 밝혔다.

■ 인물 중심으로 조선사회 소개·비평

인문과 인물 중심으로 서술돼 술술 읽힌다. 평소 들어보기 힘든 왕실 얘기를 포함해 예술 풍속 설화 전설 길흉화복 외교사 제도 같은 다양한 소재를 다뤘다. 우습거나 무서운 얘기도 많다. 저자가 입신양명해서인지 글 분위기는 대체로 밝다. 용재는 이 책을 “남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심심할 때 읽어볼 만하다”며 스스로 낮췄다.

조선 전기, 귀신·꿈을 중하게 여기는 사회상이 눈에 띈다. 민간과 조정이 다르지 않았다. 성종 17년 예조판서 유지(柳輊)는 도성 안에 귀신이 출몰한다고 아뢨다. 호조 좌랑 이두와 영의정 정창손은 귀신에 고통받는 관료였다.

저자는 꾸밈없고 짓궂은 성격이었다. 지인 말을 훔쳐 타고 다녀 소동을 일으켰다. ‘꽃밭에 ○○○○’라는 요즘 표현이 조선 전기에도 있었을까? 9권에 ‘꽃밭의 곰’이란 문장이 나온다. 주인공은 송 사문으로 그는 의료기관(혜민서) 외방 교수였는데 용모가 볼품없었다. 수염은 덥수룩, 눈은 침침, 게다가 사시였다. 제자인 의녀들은 어리고 단아한 용모. 그녀들에 둘러싸인 송 사문을 보곤 “꽃밭 가운데 늙은 곰이로다”며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1권 첫머리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문장가 서예가 화가 음악가를 다뤘다. 평가는 거침없고 날카롭다. 내로라하는 문장가들을 도마 위에 올렸다. “이숭인은 온화하지만 장대하지 못했고, 정몽주는 순수하지만 긴요하지 못했으며, 정도전은 장대하지만 단속하지 못했다.” 장단점을 두루 보았다. 문장은 인격과 학식을 보여준다는 설명.

안평대군이 엮은 소상팔경시첩.
안평대군 사례가 자주 보인다. 그는 조맹부 서체를 잘 써 중국 사신은 대군 글씨를 받아 갔다.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글씨를 사서 돌아왔는데 알고 보니 안평대군 작품. 대군이 무척 기뻐하며 의기양양했다고 용재는 썼다.

비평이 적잖다. 당대 한양 풍속과 세태가 옛날보다 못하다고 꼬집었다. 혼례나 손님 치르기 같은 의례가 그 예. 잔치를 너무 사치스럽고 떠들썩하게 자주 벌였다. 저택과 객관에서 3인 이상이 모이면 기생과 음악을 쓰며 잔치를 즐겼다. 종들이 여기에 동원됐는데 일을 잘못하면 매를 맞았다. 기생은 수고비도 없이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옷이 해질 지경. 지금도 보이는 권력형 폭력, 뿌리가 깊다. ‘갑질’ ‘학교 폭력’ 같은 게 있었다. ‘신참례’가 그랬다. 이 악습이 과거급제자 아전 군인 심지어 종들 사이에까지 번졌다. 나라에서 법으로 막았지만 어기기 일쑤여서 삭탈관직당하는 사례도 여럿 나왔다. 조선 전기 한양은 이미 고물가, 인구 밀집, 주택난, 빈부 격차 같은 거대 도시병을 앓았다.

등장인물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태조 때 판서를 지낸 이행(1352~1432)은 물맛을 잘 알았다. 차를 다리다 물을 조금 더해도 그 변화를 느꼈다. 그는 조선에서 물맛 좋기로 충주 달천수(속리산~충주 시내 강물)가 으뜸, 둘째는 우중수(금강산에서 나와 한강 한가운데로 흐르는 물), 속리산 삼타수를 셋째로 쳤다. 당시 한양에서는 우중수가 가장 비쌌다.

■ 문예 중심 시대… 인재집단 중요성 강조

해동청(사냥용 매) 꼬리에 다는 시치미. 매 주인 이름과 주소, 매 이름이 적혔다. 시치미 뗀다는 관용구가 여기서 나왔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저자는 용재총화에서 ‘음악과 춤을 즐기는 조선’을 그려낸다. 음률을 아는 사대부 가문에서는 종들에게 노래와 연주법을 가르쳤다. 담장을 넘어 들려오는 아름다운 선율에 행인이 걸음을 멈추고 완상하는 풍경, 조선 전기에서 볼 수 있었다.

나라 일할 때는 열심히, 쉴 때는 내 마음대로! 세조 때 원종공신이었던 마천 홍일동(?~1464)은 잘 씻지 않고, 먹고 마시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중국어를 잘해 사신으로 중국에 자주 갔는데 현지에서 마른 말똥을 주워 불을 붙여 만두를 구워 먹었다. 세조가 그걸 알고 “이 자는 불결하니 제사 향관을 맡기면 안 된다”며 놀렸다. 그는 중국 남방에 갔다가 귀국하던 중 홍주에서 술을 몇 말이나 마시고 죽어 버렸다. 명문장가 김수온이 애도 시를 지었다. ‘통음할 때는 천 잔 술 무겁더니(痛飮千盃重)/뜬 인생은 한 깃털처럼 가볍구나(浮生一羽輕)’.

용재총화 속에서 보존해 나가면 좋은 우리 전통문화를 찾는 건 어렵잖다. 장가가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뭘 해주면 좋을까. 조선 전기엔 혼인 하루 전날 밤에 초자례(醮子禮)란 의례를 치렀다. 아버지는 친지 가족이 참석하는 주연을 마련하고, 아들에게 술을 권하며 “아내를 맞이해 와서 집안을 잘 이끌어 달라”고 다독였다.

조선 사대부는 모화사대사상에 젖었는데 용재도 그런 성향을 보인다. 9권 ‘우리나라와 중국이 다른 점’ 편이 그러하다. 조선인은 간교하고 의심이 많지만, 중국인은 순수하고 인정스러우며 의심이 적다고 썼다. 민족성 외에도 소비성향 공무 식성 군제 같은 여러 부문에서 중국을 높이 샀다. 현대 한국인이 내놓는 중국 평가와는 결이 다르다.

용재총화에 드러난 조선 전기는 어떤 모습인가. 무(武)나 물(物)보다는 문예를 중시한 나라였다. 이런 성향은 유약을 빚어 그 후 나라가 외세에 시달렸다. 후유증은 지금도 가시지 않는다. 다행히 현대 들어 문예가 가진 힘이 새로운 국제 경쟁력이 되니 전화위복이긴 하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抑佛, 성리학을 높이고 불교를 누름)을 건국·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대한민국이 종교 국가가 아닌 건 장점이자 단점이다. 국가 대사를 이뤄내야 할 때 응집력이 약해 국론을 모으기가 어렵다. 종교 힘을 빌릴 수 없다면, 인재를 구해 나라를 융성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용재는 뛰어난 혼자보다는 폭넓은 인재 집단이 국가 이익을 생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다름 아닌 자유민주주의 이념이다. 이 땅 인재를 두루 못 썼던 조선 전기인데 그 패착이 지금도 빚어지지 않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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