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이 종식된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고자 김규식을 파리로 파견하고 파리위원부를 설치했다. 이때 김규식과 함께 활약한 이가 미군으로 1차 세계대전 참전하고 유럽에 남아있던 황기환(1886~1923)이다. 황기환은 파리위원부의 서기장으로서 1921년 이승만의 부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프랑스와 영국에서 많은 외교활동을 펼쳤다.

한인의 결혼식에 참석한 서영해. 앞줄 왼쪽 끝에 서영해. 부산박물관 제공

특별히 기억할 만한 일은 1919년 러시아 무르만스크 철도 노동자의 강제 이송 사건이다. 무르만스크의 철도 공사 현장 등지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한인들이 1차대전 당시 이곳을 점령한 영국군을 따라 에든버러까지 들어갔다. 일제가 이 한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해 줄 것을 영국 정부에 요구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황기환을 영국으로 급파하여 이들 중 37명을 프랑스에 정착시켰다.

이 한인들은 1차대전의 최대 격전지 베르덩(Verdun)이 있는 프랑스 마른(Marne) 지방의 벌판에서 시신과 유골을 수습하고 전사자 묘지를 조성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고된 삶 속에서도 가정을 일구었고 독립자금을 모아 보냈다.

이들 중 배재학당 시절 독립운동에 가담하다 일제의 검거를 피해서 만주를 거쳐 러시아에 갔던 홍재하(1892~1960)가 있었다. 홍재하는 1920년 1월 프랑스 최초 한인단체인 재법한국민회 조직에 참여해 그해 7월부터 제2대 회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상해로 몰려든 젊은이들을 미국과 유럽에 유학을 보내 인재를 양성했다. 상해에서 한국인이 유럽으로 유학 갈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정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데, 1차 세계대전 중에 중국은 유럽에 노동자를 지원했었고 그 보상으로 자국 학생을 유럽으로 유학 보낼 기회를 얻었다.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에 요청하여 소수의 한국 학생을 끼워 보낼 수 있었다.

1920년 11월 상해에서 출발한 서영해(1902~?,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 등 한국 유학생 21명은 12월 마르세이 항구에 도착했다. 이 중에서 프랑스 유학을 선택한 몇몇은 파리위원부 서기장 황기환의 주선으로 파리 북쪽 소도시 보베에서 유학을 시작했다. 훗날 서영해는 1929년 고려통신사를 설립하여 황기환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기능이 마비된 파리위원부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모델로 알려진 황기환 지사는 10대에 미국으로 가서 미군이 되었고 유럽전장을 누볐으나 생전에 조선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서거 100주년인 2023년 4월, 뉴욕에 묻혀있던 그의 유해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접하고 박물관 수장고 속 황기환의 동지들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