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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80> 로빈슨 크루소-대니얼 디포(1660~1731)

긍정맨 크루소 서사…어려서는 탐험기, 커서 보니 홀로서기 지침서

  • 서부국 서평가·‘고전식탁’ 저자
  •  |   입력 : 2024-01-04 19:02:12
  •  |   본지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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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유럽 열강 재화 쟁탈전
- 무인도서 ‘1인 사회’ 구축 실험
- 독특한 소설로 40년간 40판 출간
- “허구는 없다” 했지만 꾸민 이야기

- 청교도 집안 내력 종교적인 성찰
- 인종·국경 넘은 인류애까지 담아
- 대영제국 태동기 영국인들 열광

- 혼자 살아내는 현대인의 삶 투영
- 꿈꾸는 대로 이뤄진다는 ‘희망가’

해마다 섬은 문학 속으로 들어와 의미심장하게 솟아났다. 지난해 부산영화평론가협회는 24회 대상작으로 예술 영화 ‘절해고도’(김미영 감독)를 뽑았다. 김미영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 영화 제목을 설명하면서 ‘사람은 혼자 되지 않으려고 서로 건너가려는 섬 같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들려줬다.

18세기 유럽 역사 속에도 섬이 보인다. 영국 에스파냐 포르투갈을 포함한 유럽 열강은 해외로 진출해 섬과 육지에서 재화를 쟁탈하는 각축을 벌였다. 시대를 비추는 당대 문학은 바다와 섬을 주제어로 내세웠다. 그중 장편소설 ‘로빈슨 크루소’가 우뚝하다.
로빈슨 크루소가 살았던 무인도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과 텐트 거주지 등을 한 그림에 그려 넣었다. 이 삽화 가운데를 보면, 농장에서 앵무새 폴이 “불쌍한 로빈”이라고 소리치고 있다.
■40여 년간 40판 출판

초판(1부)은 1719년 4월 25일 나왔다. 그 후 4개월간 4쇄를 찍었다. 인쇄기에서 불이 날 지경이었다. 호사다마인가. 뜨거운 인기에 편승한 위작이 활개쳤다. 디포가 손을 썼다. 8월이 되자 2부를 덧붙였다. 위작이 못 따라왔다. 이렇게 해서 ‘로빈슨 크루소’는 2부작으로 거듭난다. 40여 년간 40판을 출간! 대기록이다. 디포는 1720년 3부 격인 ‘로빈슨 크루소의 진지한 고찰’이란 작가 해설서까지 내놓았다. 60세에 명성을 얻은 늦깎이 작가.

‘로빈슨 크루소’는 허구다. 저자는 머리글에서 ‘허구 같은 건 전혀 없다’고 썼지만. 물론 소설가 전매특허인 ‘하얀 거짓말’이다. 이를 후배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가 눈여겨봤는지 ‘걸리버 여행기’(1726년)에서 써먹었다. 디포가 다사다난한 삶에서 얻은 연륜, 장서에서 읽은 항해·통상·탐험 얘기를 버무린 진짜 같은 표류기를 지은 역량에 내심 놀랐을 터.

어린이일 때 ‘흥미진진한 표류 탐험기’로 읽었다. 성인이 돼 ‘홀로 서는 인생 지침서’로 다시 만나 보시라. ‘허클베리 핀의 모험’ ‘걸리버 여행기’처럼 말이다. 원래 성인용으로 쓰였으니까.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무인도에서 1인 사회 구축이란 사고실험을 소설로 수행한 독특한 고전. 자신을 크루소라고 빙의하면 잘 먹힌다.

그리하면, 즉각 떠오르는 걱정. ‘이 무인도에서 어떻게 먹고 살아?’ 원시인처럼 동식물을 잡아 이빨과 손으로 물고 뜯어 먹어야 하나. 아니다, 오래 못 가. 할 일도 없지 뭐(작가는 쓸 거리가 없고). 이 문제는 난파한 배가 해안 가까이 떠밀려 온 걸 크루소가 발견한다는 설정으로 해결된다. 장기 항해하는 100t급 배엔 웬만한 생필품은 다 실리는 법. 뗏목으로 난파선에서 그 물자들을 깡그리 실어 나른다.

개 한 마리, 고양이 두 마리도 데려왔다. ‘로빈슨 크루소’는 맨땅에 박치기하는 표류기가 아니다. 웬만한 물자는 갖추고 자급자족하는 분투기. 몸을 엄청나게 써야 하는 게 문제이긴 하다. 가령, 나무판자 한 장 만들려고 거목 한 그루를 베었다.

몸만 고된 것도 아니다. 마음은 더더욱 힘들다. 살아남으려면 마음 잘 다스려야 한다. 없던 신앙심이 생기고 성경을 읽게 된다. 신(神)에 불경스러웠던 크루소는 난생처음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 계기에서 인간미가 물씬 난다. 동굴을 파던 자신을 흙더미에 묻히게 할 뻔한 지진도, 오두막 텐트를 날려버릴 기세인 야간폭풍도 아니었다.

이 오만한 표류자를 한 방에 무너뜨린 건 병(病)이었다. 돌봐 줄 이도 없는데 학질에 걸려 죽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천벌 받았다고 소리치며 두 손 모았다. “안락한 생활을 보장하는 가정을 떠나지 말라고 양친이 그토록 타일렀건만…. 난 죽어도 싸.” 사람이 아플 때 가장 서럽다고 하잖은가. 디포도 그걸 잘 알았나 보다.

크루소는 점차 독실한 신앙인으로 변해간다. 식인종에게 잡아먹히려는 또 다른 식인종 청년을 구해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신앙과 영어를 가르친다. 백인·식민주의 잔상이 보이지만, 비난할 정도는 아니다. 신학대학을 나와 청교도 신앙을 가졌던 디포는 이에 만족하진 않았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통합해 종교 간 장벽을 넘어 복음을 실천하는 에큐메니즘을 받아들여 인종·국경을 넘어선 만민 박애 정신을 내세웠다. 이 고전엔 생명을 존중하는 사상이 깃들었다.

크루소가 터득한 두 번째 마음 다스리기. 만사 긍정하기다. ‘난 막막한 무인도에 내던져진 불행한 인간이 아니다. 11명 선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행운아야.’ 삶을 긍정하라! 무인도에 표류하기 전부터 그랬다. 이 고전은 신앙 고백이 자주 나온다. 그런 성찰은 당시 절대다수인 영국 국교회 신자를 열성 독자로 끌어들였다. 대영제국이 돼 가는 과정에 놓였던 당시 영국인들에게 이 고전은 구미에 잘 맞았다.

■여행기로 구성된 2부

1703년 토리당이 내린 3일간 형틀형을 받는 디포. 시민들이 꽃을 던지며 성원하고 있다.
1부는 28년간 경험한 무인도 표류기다. 2부는 무인도에서 구조돼 귀향한 후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지를 10여 년 돌아다닌 바를 쓴 여행기다. 회고하는 투로 이야기 문을 연다. 1651년 9월 1일 19세인 나, 뱃사람을 꿈꿔온 로빈슨 크루소(본명 로빈슨 크로이츠넬)는 집을 뛰쳐나왔다. 양친은 중산층이 누리는 안락한 삶을 제 발로 차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라고 타일렀지만 말이다.

나는 헐에서 부친이 선장이자 선주인 친구를 만나 그 배를 타고 런던으로 간다. 이 첫 항해는 폭풍을 만나 배가 침몰한 바람에 실패로 끝났다. 다른 조난 선원들과 함께 가까스로 크로머 해안에 닿아 목숨은 구했지만, 세상 조롱이 두려워 귀향하진 않았다. 두 번째로 탄 배는 아프리카 기니행 무역선. 이번엔 개인 장사로 재미를 좀 봤다.

세 번째 항해에서 큰일 났다. 모로코 살리 해적선에 붙잡혔다. 여기서 2년간 노예로 살다 탈출해 브라질에 닿았다. 4년여 농장을 경영하다 남아프리카로 가 노예 흑인을 데려오게 됐다. 고향을 떠난 지 8년 만인 1659년 9월 1일 기아나행 배에 올랐다. 나를 포함해 17명이 탄 115t 배는 12일 만에 폭풍을 두 번 만나 모래 턱에 좌초한다. 남미인 브라질 오리노코강이 바라보이는 연안에서다. 생존한 선원 11명을 태우고 육지로 가던 보트는 파도에 뒤집혔다. 나만 살아남았다. 해안에서 정신 차린 크루소, 지닌 건 칼 한 자루에 담배 파이프와 담뱃갑이 전부였다.

나무 위에서 첫날 밤을 보낸 다음 날 해상에서 떠내려온 난파선을 찾아낸다. 식료품 술 곡물 공구함 엽총 권총 화약 도끼 쇠망치 목제 범포 침대 숫돌 그물 노끈…. 난파선에서 뗏목으로 이런 걸 섬으로 실어 날랐다. 13일 동안 12번. 배는 폭풍이 불었던 밤 사라졌다.

이렇게 시작된 무인도 삶은 28년 후 섬을 떠날 땐 딴판이다. 에스파냐인, 영국인, 개화한 식인종 남녀가 거주하는 유인도로 바뀌었으니까. 근면하게 노동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작은 사회다. 이런 서사에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론 1’에서 “경제학자들은 크루소를 좋아한다”, 애덤 스미스는 “크루소는 매우 강인한 사람”이라며 눈여겨봤다. 합리성 아래 정직·성실하게 일하는 걸 당시 영국 중산층은 꿈꿨다.

디포는 그 소망을 이 소설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통해 이뤘다.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혼자 살면서 어떤 일을 할 때 좋은 점과 나쁜 점, 이익과 손해로 나누어 저울질하는 ‘생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모습에서 영국인 내면을 본다.

이 고전은 각자 삶이란 섬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우화다. 새해를 맞는 이들은 올 한 해를 무사히 항해하길 기원한다. 건너가야 할 바다가 어떨지 누가 알겠는가. 홀로 생활해야 할 시간만은 여전할 터이다. 무사히 이 바다를 건너가야 할 텐데 하고 걱정하는 이에게 디포가 건네는 말을 전한다. “‘햇살’이 따사로울 때 ‘폭풍’에 대비했던 크루소는 살아남아 그 섬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었답니다. 준비하고 기다리세요. 소망을 이루는 날은 반드시 옵니다. 신념을 다져온 이만이 이 선물을 받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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