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건축가이자 철학자인 폴 비릴리오는 저서 ‘소멸의 미학’에서 식탁에 둔 컵의 존재를 잊어버린 아이의 예를 든다. 아이에게 컵은 눈에 보이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그 때문에 무심코 팔을 흔들다 물을 쏟아버리고 꾸중을 듣게 되지만 억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선을 돌리자마자 물이 든 컵은 아이의 의식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풍경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며 의식의 공백을 경험하는 아이의 지각은 성장하면서 달라진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받아들이도록 훈련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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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 스틸컷. 공식 홈페이지 제공 |
영화의 몽타주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절된 장면을 이어 붙이는 방식에 따라 시공간은 재구성되고, 관객은 분절된 사건의 흐름을 연속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모종의 함정이 있다. 우리는 프레임이 허용된 만큼만을 보고, 익숙한 서사의 관성에 따라 나머지 내용을 상상하고 짐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단편적인 순간의 집합을 토대 삼아 임의로 재구성한 대안 서사가 총체적 진실과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다. 단지 입장에 따라 납득할 수 있는 각자의 스토리를 만들고, 합리적이라고 스스로 믿어버릴 따름이다.
‘괴물’(2023)은 이와 같은 서사의 맹점을 지르고 들어간다. 영화가 세운 공의 절반 이상은 각본을 담당한 사카모토 유지의 몫일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명상적인 연출 호흡은 복합적인 구조를 갖도록 짜인 각본을 만나며 장르영화 못잖은 긴장과 몰입감을 얻고, 거기에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BTTB’ 앨범에 실린 ‘aqua’가 메인 테마)이 모여 최고도의 시너지를 발휘한다.
‘라쇼몽’(1950)처럼 영화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축으로 두고 엇갈린 세 가지 시선을 번갈아 제시한다. 시가지 한가운데서 화재에 휩싸인 건물을 비추는 장면은 각기 다른 앵글로 반복되며 영화 시점이 바뀜을 환기시킨다.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은 각 장이 그 자체로 독립된 완결성을 갖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처럼 속이는 ‘서사적 트릭’에 있다.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의 어머니 사오리(안도 사쿠라) 시점에 철저히 입각한 영화 첫 장은 교내에서 벌어지는 이지메와 진상을 은폐하려는 학교 조직 간 대립으로 믿어지도록 관객을 속인다. 그러나 사오리 관점에서는 완전한 정합성을 가졌던 담임 호리(나가야마 에이타)의 이지메는 정작 교사 입장에 들어가는 두 번째 장에서는 판이한 진상을 드러낸다.
미나토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를 괴롭힌다고 보는 호리의 믿음 또한 두 아이의 동성애적 관계라는 진상이 드러나는 마지막 장에서 사실은 오해였음이 드러난다.
이 모든 이야기가 형식적인 안정과 평화를 위해 문제의 근원을 외면한 채, 비정상적인 개인을 솎아내고 배제하라는 일본식 질서 의식에 대한 비판으로 수렴됨은 물론이다.
한편으로 ‘괴물’은 서사의 구성 방식을 통해 또 다른 행간의 메시지를 남긴다. 어쩌면 세상은 저마다의 정의와 진실만이 옳다고 믿는 ‘괴물’이 넘쳐나서 활활 불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지각과 믿음은 진실을 다루기엔 너무나도 불완전하며, 그토록 확신을 가지기엔 허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확신의 함정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객관의 거리를 잊지 않는 것이다.
불길이 치솟는 우리 세상이 언젠가 고즈넉한 물가의 평화에 이르기 위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