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쉰들러 리스트’(1993)에 관한 글에서 멋들어진 비유를 든 바 있다. 경비원은 도둑이 들 것을 걱정해 매번 출입하는 손수레에 무엇이 들었는지 철저히 감시한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한 채 당하고 만다. 도둑이 훔쳐가는 건 다른 물건이 아닌 손수레 자체였던 것이다.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2023·사진)는 바로 그 손수레와도 같은 영화이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얻은 영화는 겉으로는 사건의 진실을 추리해 나가는 법정스릴러처럼 보인다. 뒤로 흘러갈수록, 영화는 최종적 진실에 도달하길 바라는 우리의 기대와 어긋나고 만다. 중요한 건 감춰진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법정 공방에서 펼쳐지는, 장님 코끼리 더듬기 마냥 헤매다 무너지는 인간군상의 혼란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오토 프레밍거의 ‘살인의 해부’(1959), 더 나아가 빌리 와일더의 ‘검찰 측 증인’(1957)을 의식했을 영화는 작가 산드라(산드라 휠러)와 대학교수 사뮈엘(사뮈엘 테이스) 부부, 교통사고 충격으로 시각장애를 안게 된 아들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의 일상이 파열음을 내며 깨지는 데서부터 막을 연다. 산드라는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학생을 맞이하고, 다니엘은 강아지 스눕을 데리고 산책하는 가운데, 사뮈엘 혼자 추락해 의문의 죽음을 맞고 시체로 발견된다.
주의 깊게 연출된 상황의 설정이 있다. 아내 산드라는 남편 사뮈엘이 틀어놓았을 높은 볼륨의 음악 때문에 타인과의 대화를 방해받는다. 사건 당일, 위층에 있을 사뮈엘의 존재를 가족 중 누구도 직접 눈으로 목격하지 못한다. 테니스공이 굴러떨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온 스눕은 현장의 무언가를 보았음직하고, 카메라는 종종 낮은 앵글로 강아지 눈높이에서 공간을 보기도 하지만, 정작 동물에게는 의사표현능력이 결여돼 있다.
인지능력이 차단당한 작중 인물의 상황은 관객 입장으로 고스란히 전이된다. 분열된 가족과 소통 불가능성 그리고 파편화된 진실. 이 도입부는 영화의 주요한 모티브를 다 담고 있다. 결정적 증거가 제시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법정은 어느 쪽 시나리오가 설득력이 있는지 겨루는 승부의 장으로 변질된다. 배심원단에 판단의 재료로 주어지는, 생전 사뮈엘이 남긴 부부싸움 녹음파일 또한 표정과 뉘앙스, 행동 같은 구체적 시각 정보가 잘려 나가 확신할 수 없는 점투성이인 정황 증거일 뿐이다. 프랑스어가 서툰 독일인 여성작가는 영어 통역을 거쳐야 하고, 사실상 재판 향방을 결정지은 사뮈엘의 독백은 마치 ‘라쇼몽’(1950)에서 살해된 사무라이의 영혼에 빙의한 무당의 목소리처럼 아들의 증언을 통해서야 전달될 수 있다.
‘추락의 해부’는 소통 불가능의 조건을 겹겹이 배치해 놓음으로써, 표면의 이면에 자리하는 삶의 근원적 비극성을 응시케 한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괴물’(2023)에 연이어 진실의 상대성에 관한 영화를 다시 만나는 셈이다. 같은 지평에 서있더라도, 내가 보는 세상과 당신이 보는 세상은 같지 않고, 저마다 섬이 돼버린 인간과 인간 사이엔 도저히 못 건널 깊은 질곡의 심연이 패여 있다. 우리는 어디까지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의 앎, 그리고 우리의 관계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