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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사마천·정약용…이병주 세계에 녹아든 고전을 탐하다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1> 프롤로그

  • 조광수 정치학 박사·전 한국아나키즘학회장
  •  |   입력 : 2024-03-10 18:55:26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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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수 전 한국아나키즘학회장(전 영산대 교수)이 쓰는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을 격주로 연재한다. 나림 이병주는 동서양 인문 고전을 일찍부터, 오랜 세월, 집요하고 방대하게 읽은 독서가이자 인문학자였다. 인문 클래식의 핵심을 단박에 파악하고 잘 발표해 창의성 넘치는 글로 표현했다. 나림 문학 속 인문 클래식의 가르침은 오늘 우리에게 생생하고 새롭게 다가온다. 그 세계를 탐험한다.


- 엄청난 다독을 바탕으로 한
- 무궁무진한 지식의 보유자
- 체화된 고전의 폭과 깊이가
-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 깨어있는 아폴론의 지혜와
- 도취된 디오니소스의 감성
- 함께해야 창작이 된다 믿어

- 나림에게 무한한 자원이 된
- 동서양 클래식 찾아보는 기획

클래식 즉 고전은 읽고 또 읽는 책이다. 고전은 읽을 때마다 늘 새롭다. 내용은 그대로이지만 읽는 사람이 성장하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작가 나림 이병주(1921~1992)는 박학강기(博學强記)였다. 박학은 동서양 고전을 섭렵하는 데서 시작한다. 강기는 보고 들은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핵심을 파악하는 역량이다. 박학강기는 천재의 한 특징이다. 나림은 천재가 대재가 된 희귀한 경우다.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병주문학관 뜰에 세운 나림 이병주 선생 조형물이다. 손에 든 책은 아마 동서양 인문 클래식 중 한 권일 것이다.
■“근 300년 3대 박식가”

시인 허만하는 이병주를 품인(品人)하며 서랍에 비유했다. 이 서랍을 열면 이런 지식이 쏟아져 나오고 저 서랍을 열면 저런 지식이 흘러나온다며 무궁무진한 지식과 이야기에 경탄했다. 다독가(多讀家)이자, 맥락·핵심을 단숨에 장악하는 이병주의 강인한 내공을 상찬했다. 언론인·정치인이었던 남재희는 나림의 폭넓은 독서와 깊은 사색, 놀라운 필력을 아낌없이 인정했다. “이병주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으며, 소설보다 오히려 에세이에서 그 실력이 더 드러났다”고 했다. 저서 ‘남재희가 만난 통 큰 사람들’에서 그 지적 볼륨과 깊이에 압도당했다고 했다.

고전문학자 김언종은 “이병주를 이가환과 정약용과 함께 근 300년 3대 박식가로 부르고 싶다”고 극찬했다. 나림의 박식은 백과사전식 박식이 아니라 일관된 그 무엇이 있는 박학다식이라고 했다. 과연 나림은 책을 읽는 데서 깊은 의미와 기쁨을 느꼈다. 교도소 마당에서 건너편 언덕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왕래를 보며 “책 읽을 수 있는 서대문 형무소 감방이 책 읽을 수 없는 자유보다 오히려 낫다”는 인식을 할 정도였다. 자유와도 바꿀 수 없는 독서 삼매경이다.

독서의 폭과 깊이는 그대로 체화되어 나림 작품에 녹아있다. 때로 친절하게 풀어서, 때로 생경하게 날것으로, 때로 아포리즘 몇 대목으로 소개한다. 작품 속에서 나림의 문학과 동서양 고전은 절묘하게 어울린다. 나림이 가장 즐겨 인용하는 아포리즘은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대표인 노발리스의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와 극복한 사람 초인(超人) 사상을 피력한 니체의 “사람은 혼탁한 강물이다. 그 탁한 강물을 스스로 더럽히지 않고 받아들이려면 바다가 되어야 한다”는 대목이다.

‘행복어 사전’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거듭 인용한다. 니체의 “스스로 힘에 겨운 뭔가를 시도하다가 파멸한 자를 나는 사랑한다”는 대목도 나림 문학의 좌우명 중 하나다. 소설을 통해 역사에 기록되지 않거나 기록할 수 없는 함정을 메우는 작업을 하겠다는 일념을 감옥에서 지녔다. 옥중에서 무수한 책을 읽으며 여백에다 장차 쓸 소설의 소재를 새까맣게 메모했다. “사막에 불시착한 나폴레옹” 류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의 달빛에 가린 인생사를 독자와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나림은 학문과 문학을 융합하려 애썼고, 성공했다.

■지혜와 도취는 두루 필요하다

나림의 서양 고전 이해는 아폴론적 지혜와 디오니소스적 도취를 비교하거나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차이를 언급하는 대목에서도 선명하다. “아폴론이 깨어있는 정신이라면, 디오니소스는 도취되어 있는 감동이다”는 표현이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나림은 인간의 삶과 예술 모두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협동으로 이루어진다고 여겼고, 디오니소스적 생명의 도취 없이는 아폴론의 총명은 그저 고목일 뿐이란 인식이 분명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이니 무릇 작가는 아폴론적 이성과 디오니소스적 창작정신을 두루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디오니소스는 구체적으로 술과 성의 도취다. 호색과 광기라는 금기를 해제하는 존재다. 여기서 에로티시즘이등장한다.

나림은 ‘에로스 문화탐사’라는 한국문화사의 기념비적인 책을 썼다. 책은 1987년에 출판됐지만 그 내용은 1973년부터 2년에 걸쳐 ‘서울 평론’에 56회 연재한 칼럼이다. 아직도 사회적으론 성리학적 금욕주의가 근엄하게 작동하고 정치적으론 유신체제 통제가 엄혹하던 시절인 1973년 금기를 깨는 일탈적 글쓰기를 한 배포와 필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나림의 소설에는 주색 묘사가 질펀하다. 나림은 ‘금병매’를 번역하기도 했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차이를 비교하는 대목도 여러 작품에 나온다. 유럽 문명사를 정리하면서 한 “술을 마시고 기분 좋아지는 걸 그냥 긍정하는 태도를 헬레니즘이라 하고, 술 안 마셔도 기분 좋아지는 방법을 연구하는 태도를 헤브라이즘이라고 한다”는 통찰은 압권이다.
이병주문학관 앞 공원에 있는 표지판 가운데 하나로, 그의 삶과 문학을 설명한다.
■동서와 고금, 다 공부해야 한다

나림의 동양고전 이해는 공자와 장자, 사마천을 거쳐 당송 시대 시인과 근현대 루쉰까지 폭넓고 깊다. 나림은 탈이념주의자로 이데올로기를 불신한다. 공자의 유연하고 소박한 사상이 후대에 와서 경화된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간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장자의 자유와 해방에 깊이 공감한다. ‘문학을 위한 변명’에서 “공자야말로 존재의 유한성을 누구보다 깊이 자각했고, 그 자각이 현실에 대한 사랑과 겸허의 심정으로 나타난 것이다”라고 하며, ‘논어’ 여러 장면을 인용한다.

‘허균’에선 조선 유학 이데올로기의 타락과 갑갑함을 비판하고, ‘장자에게 길을 묻다’에선 도덕 테두리를 넘어서는 생명·자유를 말한다. 탈속함·의협심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아나키스트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와 ‘허상과 장미’에선 한국 아나키즘의 독특함을 드러낸다. 그 독특함이란 바로 격조인데, 격조는 동양적 수양을 바탕으로 한다. 나림이 니체와 도스토옙스키를 만난 것이 운명이었다면, 사마천과 루쉰은 스승이었다. 사마천은 나림이 기록자 문학을 하게 하는 향도였고, 루쉰은 학자·언론인 시절 롤모델이었다.

사마천의 울굴함과 발분저서에 깊은 공감을 느낀 나림은 옥중에서 ‘사기’를 읽고 또 읽는다. “원(怨)은 난(亂)을 만들고, 한(恨)은 문화에 통한다”는 사마천과의 동병상련은 결국 ‘이사마’란 필명으로 이어진다. 스무 살 때 루쉰을 만난 이후 ‘아큐정전’을 10번 이상 정독했고, 진주 학자 시절엔 루쉰 연구에 천착했으며, 부산 언론인 시절엔 루쉰의 촌철살인 칼럼을 닮은 글을 쓰려고 애썼다. ‘허망과 진실 2’는 사마천과 루쉰 깊이 읽기의 결정판이다.

나림의 한국 사상에 관한 관심은 도쿄 유학 시절 이상백을 만나면서부터이다. 이상백은 와세다 대학의 연구원으로 베이징에서 유학한 경력을 가진 사회학자이자 일본 농구계의 스타였다. 한국 유학생들의 멘토이자 울타리 역할을 했던 품이 큰 인물이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유학생 몇이 그의 사무실에서 “조선에는 괴테나 루소 같은 사상가가 없다”며 갑론을박했다. 그 끝에 이상백은 원효와 정약용을 소개했고, 나림은 그날 밤 한적(漢籍) 도서가 그득한 그의 자택을 찾아 ‘목민심서’ 7권을 빌려 온다. ‘관부연락선’에 그날의 에피소드가 상세하다.

이상백은 정도전을 비롯한 여말선초(麗末鮮初) 인물 연구 선구자다. 그의 역사 사회학의 영향을 깊이 받은 나림은 ‘정도전’과 ‘정몽주’를 썼고, 망국 조선을 대체할 새 왕조 신(晨)을 구상하는 최천중의 꿈 ‘바람과 구름과 비’를 썼다.

■이병주학(學)을 위하여

고전은 상상력의 보고이다. 문제가 문제인 것은 당장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전의 의미는 즉문즉답의 해소책 제시보다 상상력 제공에 있다. 나림은 고전에서 답안보다는 문제 설정 방법이 중요함을 깨우쳤다. “문제를 너절하게 세우면 아무리 좋은 답안이 나오더라도 무용한 노릇이다. 하지만 일단 문제 설정만 제대로 해놓으면 언젠가 그 문제의 크기와 깊이에 따라 답안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 고전이 주는 교훈이다. 클래식은 정신적 명품이다.

영국에 셰익스피어학이 있다. 중국에는 ‘홍루몽’과 ‘금병매’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홍학(紅學)과 금학(金學)이 있다. 나는 한국이 배출한 불세출의 대문호 이병주에 천착하는 이병주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림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이 이병주학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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