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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도 영웅도 사람일 뿐이나, 결국 역사의 중심은 사람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3> ‘이사마’의 스승 사마천②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장
  •  |   입력 : 2024-04-07 19:11:10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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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로 통사를 창시한 사마천
- 개인을 넘는 역사의 법칙보다
- 시종 개인에 천착한 기술방식
- 진시황·항우 본기가 특히 압권

- 인내와 비루함의 숭자 유방보다
- 호쾌하고 개결한 패자 항우에게
- 나림은 더 따뜻한 시선 가진 듯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 말은 말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지 않다. 다만 칼은 지구의 판도를 이리저리 변경한 일은 있어도 인간에게 인간을 알리는 작용은 못 한다. 펜은 무력했지만 문화를 기록했다. 문화란 궁극적으로 인간화 작업이다. 나림 이병주는 “무력한 펜이 강력한 칼을 압도하는 것은 그 인간화라는 점에 있다”고 했다. 에세이 ‘글을 쓴다는 것’에서 사르트르의 회고록 ‘말’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다. “나는 나의 펜을 오랫동안 칼인 양 생각해 왔다. 이제 와서 나는 우리의 무력함을 알았다. 그래도 좋다. 나는 지금도 책을 쓰고 앞으로도 책을 쓸 것이다.”
홍콩 출신 리옌쿵(李仁港) 감독의 2012년 영화 ‘초한지 - 천하대전’ 한 장면. 초한지의 핵심인물은 항우와 유방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항우 이야기를 세가나 열전이 아닌 본기에 ‘당당히’ 배치한다.
■기록자는 말한다 ‘천 년 뒤에 보자’

사마천도 붓이 칼보다 강하다는 신념을 가졌다. 아울러 붓의 무력감도 절감했다. 무의미한 흐름 같으면서도 의미가 있는 것이 역사라고 인식했다. 사마천은 도가의 무위를 익힌 사람이다.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우격다짐이나 어거지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고 자연스레 하며 모든 일을 다 이루는 것이다. ‘무소불위(無所不爲)’는 바로 그런 뜻이다. 사마천은 역사가의 무위는 결국 무소불위임을 믿었다.

역사가는 그저 기록할 뿐이다. 사실을 기록하고 그 기록된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한다. 기록함으로 모든 일을 다 한 셈이 된다. 역사의 재판관이 되는 것이다. 당당한 제왕의 칼보다 초췌한 기록자의 붓이 더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림은 ‘그해 5월’에서 사마천이 쓴 ‘임안에게 보내는 답서’ 전문을 소개한다. 서신에 이런 대목이 있다. “죽음은 하나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 이 편지가 산일되지 않고 2000년을 살아남은 기적은 이 편지가 뿜어내는 살기(殺氣) 때문이다.

이미 산 송장이 돼버린 사마천과 이릉,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는 임안 세 사나이의 원념(怨念)이 그만큼 깊다. 국사(國士) 풍모를 지닌 인재들이 사람다움을 견지하려다 오히려 가장 비인도적인 박해를 받은 처절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마천은 “맹호가 심산에 있을 땐 백수가 겁내어 몸을 떤다. 그러나 함정에 빠져 우리에 갇히면 맹호도 꼬리 치며 먹이를 구걸한다”며 구차한 연명을 자인하지만, 천년 후에 승부를 보자는 기록자로서의 배알이 있었다.

■진시황의 마지막과 ‘악취’

중국 시안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앞에 세워진 진시황 조형물.
나림은 ‘사기’ 구성의 수발(秀拔)함에 먼저 주목한다. 사마천은 통사(通史)를 창시했다. 복잡한 세계의 내력을 기술할 최상의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이전에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연대기적 기록인 편년체를 넘어 위대한 창작을 해냈다. 그리고 그 탁발한 구성은 곧바로 내용과 통한다. 구성과 내용에서 동서고금을 통틀어 ‘사기’에 비견할 역사서는 없다.

사마천은 개인이 역사의 중심이라고 통찰했다. 역사를 힘의 역사로 정의하고, 그 힘의 주체는 인간이라고 여겼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세계의 중심은 하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뜻이 하나이고, 정치적 인간의 에센스이자 권력의 중심인 제왕도 결국은 인간으로서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 또 하나다. 제왕도 대체로 시시하지만 “그 시시한 권력의 중심”이 역사의 결정적 대목을 장식한다는 사실을 수긍할 수밖에 없는 기록자의 아연함이 느껴진다.

역사의 교통사고처럼, 하나의 인물로 세상이 온통 바뀌게 된다면 역사는 우연의 연속이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마천은 개인을 넘는 법칙을 지향하기보다 시종 개인에 천착했다. 역사의 주체가 정치적 인간이라면 중심이 되는 정치적 인간의 기록은 본기(本紀)다. 중심을 둘러싼 정치적 인간 집단의 기록이 세가(世家)이고, 정치적 인간 개인 개인의 기록이 열전(列傳)이다. 본기는 개성 강한 인간 개인을 웅혼한 필력으로 현란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진시황 본기’와 ‘항우 본기’의 활사(活寫)가 빛난다. 진시황은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했다. 하지만 “시황불락(始皇不樂)”이다. 시황이 행복하지 못했던 이유는 불안했기 때문이다. 시황은 죽음을 들먹이길 싫어했다. 사마천은 시황이 순시 도중에 객사한 뒤의 모습을 건조하게 묘사한다. 썩는 냄새가 진동하여 수레에 생선 더미를 한 가마씩 얹어 호송했다. 절대자도 죽으면 썩는다고 기록한 것이다. 나림은 “본기의 주인공 제왕도 보통 사람과 똑같은 원소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라고 해설했다.

■항우 본기는 고조 본기 앞에

본기 중 압권은 단연 ‘항우 본기’다. 우선, 초한대전(楚漢大戰)에서 유방에게 패한 항우를 제왕으로 대우한 것이 놀랍다. 세가나 열전이 아닌 당당한 본기다. 다음, ‘고조 본기’ 유방 앞에 항우를 먼저 기록한 것이 예사롭지 않다. 세계의 중심이 항우와 유방으로 양분되었다는 뜻이다. 초한전은 세계의 두 중심이 천하를 두고 쟁패한 것으로, 승자 유방의 진면목을 밝히려면 패자 항우의 영웅 기세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두 세계가 충돌하는 대목을 사마천은 문사일체(文史一體)로 드라마틱하게 기록했다.

나림도 유방보다 항우에 더 주목한다. 사실 항우와 유방의 다툼에서 유방이 이긴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군사력과 인간적인 매력, 그리고 출신 성분까지 유방은 항우에 비해 까마득히 모자랐다. 그만큼 항우가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8년 동안 70여 차례 싸움에서 모두 이겼던 상승장군 항우를 마지막 전투에서 사면초가에 몰아넣어 승리한 유방의 비결은 무엇일까. 역으로 그 기막힌 조건을 갖고도 실패한 항우는 어디서 잘못된 것인가.

나림은 그 차이를 성정(性情)에서 찾는다. 유방은 비루했고, 항우는 개결(介潔)했다. 유방은 체면 불고했고 악랄했다. 항우는 포악했으나 구차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 체면 때문에 자결했다. 둘의 성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항우는 노(怒), 유방은 인(忍)이다. ‘항우 본기’에 가장 많이 보이는 글자가 노(怒)자다. 항우는 불같은 성격에 자주 화를 냈다. 노의 충동이 항우 일생을 관통한다. 최후를 맞으며 한번 웃었다. 반면 유방은 좀체 노하지 않는다. 유들유들 배짱이 좋아 참고 또 참는다. 참을 인(忍)은 마음 심에 칼 도가 들어간 글자다. 칼로 자기 마음을 찌르고 다스리는 것이다. 급한 사람과 느긋한 사람이 싸우면 급한 쪽이 백전백패다.

나림이 주목한 또 한 대목은 사마천이 유방·항우 모두에게 “읍수행하(泣數行下)”란 표현을 쓴 것이다. 항우는 마지막 전장 해하에서 사면초가를 들으며 슬프게 몇 줄기 눈물을 흘렸다. 유방은 고향 패에 금의환향해 기고만장 대풍가(大風歌)를 부르며 “읍수행하”했다. 기막힌 대조다.

나림은 ‘항우 본기’ 마지막 대목 읽기를 좋아했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희대 영웅이 최후 결전 전야에 애인 우희를 앞에 두고 “그대를 어찌할꼬, 어찌할꼬” 한탄하는 장면은 센티멘탈리즘의 극치다. 그리고 이미 진 전쟁에서 단기필마 전투로 힘 자랑 하는 장면은 한심하지만 연민이 느껴진다. 강 건너 후일을 도모하라며 한 척 남은 배에 오를 것을 정중하게 권하는 오강의 정장에게 웃으며 “나를 따르던 강동의 청년들을 모두 잃은 지금 무슨 낯으로 그들의 부형을 마주하겠느냐”며 스스로 목을 찌른 최후는 개결하다. 항우는 시종 스타일리스트였다.

■끈적한 승자 vs 장엄한 패자

유방은 후흑(厚黑)으로 천하를 얻었고 개국 황제가 되었다. 항우는 호쾌한 영웅의 삶이 천하 얻기보다 먼저였다. 유방은 역사가 되었고, 항우는 신화가 되었다. 송대 여류시인 이청조(李淸照)는 “살아서는 인걸이고, 죽어서는 귀웅(鬼雄)이다. 지금도 항우를 그리워하는 건 구차하게 강동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며 항우의 개결함을 기렸다.

끈적끈적한 승자보다 장엄한 패자가 더 드라마틱하다. 항우의 비극성은 정치적 낭만주의와 허무주의에 가 닿는다. 영웅은 인간 존재의 극대화다. 영웅이 영웅인 이유는 비극성과 일회성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 항우를 보는 나림의 눈이 따듯하다. 항우의 낭만성과 허망함은 인생과 세상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우리에게 허망의 프리즘 하나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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