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조재휘의 시네필] 인문정신과 합해진 공간의 힘

‘땅에 쓰는 시’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4-05-02 19:35:18
  •  |   본지 13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옛 사람은 인간이 자연 이치에 합치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여겼다. 원시 유학에서는 삼재(三才)라 하여 하늘(天)과 땅(地) 사이에 사람(人)이 놓이고, 이 셋이 모여야 비로소 균형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고 봤다. 전통적으로 동양 사회에서는 자연과 인간을 대립적으로 분별하지 않고 총체적으로 인식해왔던 것이다.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 스틸 컷.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단순히 환경에 순응하는 객체가 아닌, 우주 질서를 이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능동적인 주체이자 일원이었다. 하늘과 땅이 만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면, 인간은 자연의 운행에 따라 성실하게 일하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존재의 생육과 완성을 돕는 조력자가 됐다.

정다운 감독의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2024)는 이러한 참찬화육(參贊化育)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는 서울 선유도 공원부터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서울아산병원과 경춘선 숲길, 오설록 티 뮤지엄 등, 한국의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손길을 거친 공간의 여러 풍경을 스케치하면서, 개인 일상에서 묻어나는 사유의 조각이 어떻게 작업의 결과물과 연관되는지, 그 상관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땅에 쓰는 시’는 정영선 조경가에 관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하지만, 한 개인이 평생을 바쳐 이룬 성취를 기념한다는 단순한 헌정의 의미를 넘어서, 또 다른 의미의 조형(造形)으로 나아가려 한 주제의식의 산물이다. 형식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에는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인과 한국사회가 상실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점검하려는 작가적 시선의 심도가 있다.

우리는 때로 치유받는 기분이 드는 한편으로는, 저절로 일상을 구성하는 공간과 그 안에서 치르는 삶의 실제를 돌이키면서 착잡한 상념에 젖으며 영화를 보게 된다. 사람의 행복과 편의를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개발지상주의의 폐해,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끼리의 관계망도 끊겨버린 소외와 단절의 현실, 극단적인 물화(物化)에 따른 인간 정신 황폐화. ‘땅에 쓰는 시’는 물질적으로는 풍부해졌지만 어느 누구 하나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망설여지는 시대의 아이러니를 겨눈다.

회로 설계에 따라 전자의 흐름이 바뀌듯, 인간 삶은 공간에 매여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경춘선 숲길이 시민 텃밭을 조성하고 도깨비시장과도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면서 지역사회를 활성화한 사례처럼, 공간의 설계, 배치와 구성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전환이 올 수 있다. 자연의 회복을 마냥 기다리기보단 정성스레 보듬고 가꿔 생육을 북돋우며, 장소가 머금은 시간의 흔적과 의미 그리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되 새로운 쓰임을 부여하고, 공간을 쓰는 사람의 마음과 풍광을 헤아려 길을 만들고 꽃과 나무를 심는다.

조경가로서 정영선의 화두는 과거와 현재,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잇는 네트워크의 회복이다. 우리는 홀로 선 외로운 존재가 아니며, 주변 환경과 사람, 우주 만물에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행복해질 수 있음을 영화는 일깨운다. 인연생기(因緣生起).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존재에 의존할 수 있음으로써 비로소 나도 존재할 수 있다. ‘땅에 쓰는 시’에서 우리는 인문정신과 결합한 공간의 조형이 작지만 강렬한 희망을 빚어내는 걸 보게 된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폭발음 뒤 불길…인근 7000명 대피(종합)
  2. 2정부, 공연장 겸 돔구장 추진…북항 돔 아레나 ‘기회’
  3. 3부산시, 퐁피두 분관·라 스칼라 공연 백지화(종합)
  4. 4이기대 예술공원 사업도 차질
  5. 5프로야구 역대급 흥행에도 쪼그라든 ‘거인 팬심’
  6. 6‘신천지 與 입당 정황’ 친청계 반발…“김 대표, 조사 과정 제대로 밝혀라”(종합)
  7. 7울산 온산 화학공장 화재
  8. 8호텔 셔틀 타고 황령산 야경 보러가요
  9. 9변성완·박상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 송치
  10. 10구·군은 맘대로 불법 현수막…민간엔 과태료 폭탄
  1. 1‘신천지 與 입당 정황’ 친청계 반발…“김 대표, 조사 과정 제대로 밝혀라”(종합)
  2. 2신임 靑 비서실장에 임광현 국세청장(종합)
  3. 3김민석 격주 부산행 PK 민심잡기…부마항쟁 기념식 찾는다
  4. 4김지용 “정치검사 1호는 尹”…과거 행적 놓고 與 집안싸움(종합)
  5. 5박형준 “새로 할 일 없는 사람들, 전임 시정 뒤집기 집착”
  6. 6여도 야도 농지 전수조사 질타…임대수탁 부작용 등 지적
  7. 7이 대통령, 부캉이 보러 북항 방문…전재수 ‘돔 아레나’ 건의
  8. 8이헌승 “국제신문 100억대 체임 구속사유”…장관 “엄정 대응”
  9. 9“북극항로 가능성, 시범운항서 확인”(종합)
  10. 10김민석, 주진우 겨냥 “막말 땐 자격 정지 추진”
  1. 1호텔 셔틀 타고 황령산 야경 보러가요
  2. 2부산 호텔업계 “바가지요금 논란 되풀이 막자”
  3. 3금융사 AI해킹 16곳으로 늘어나…130곳은 ‘보안 미흡’
  4. 4올해 자사주 62조 태웠다…‘삼전닉스’ 과반
  5. 5현대차, 인도에 20조 통 큰 투자…생산·연구개발 거점 강화
  6. 6친환경에너지·AI기술 각축…업계 트렌드 읽고 미래로 항해
  7. 716, 17일 ‘부산금융주간’…청년교육·세미나 등 다채
  8. 8주가지수- 2026년 10월 14일
  9. 9市 기관장 하세월 임명절차…청문 통과해도 공백
  10. 10공공기관 이전 연내 발표…“산은·금감원 반드시 부산 와야”
  1. 1폭발음 뒤 불길…인근 7000명 대피(종합)
  2. 2부산시, 퐁피두 분관·라 스칼라 공연 백지화(종합)
  3. 3변성완·박상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 송치
  4. 4구·군은 맘대로 불법 현수막…민간엔 과태료 폭탄
  5. 5부산도시철 교대인력 공백 떠안은 직원들…현장 아우성
  6. 6市 ‘시간 쪼개기 계약’ 채용 관행 전면 손질
  7. 7부산중수청장 “지방청 중심 수사…기존 검찰 구조와 다를 것”
  8. 8[단독] “어? EBS서 봤던 문젠데” 부산 고교 118명 중간고사 재시험
  9. 9“나노산단 분양률 50% 고무적…미래전략 앵커기업 유치 목표”
  10. 10오늘의 날씨- 2026년 10월 15일
  1. 1프로야구 역대급 흥행에도 쪼그라든 ‘거인 팬심’
  2. 2인종차별 당한 엄지성…英 경찰 수사
  3. 3거인 3년 연속 7위…레이예스·한동희는 날았다
  4. 4황성빈은 첫 도루왕…끝까지 뜨거웠던 타이틀 경쟁
  5. 5한화, 새 사령탑에 류지현…3년 20억원
  6. 63년 無가을로 계약 만료…김태형 감독 운명은?
  7. 7프로야구 한화, 신임 사령탑으로 류지현 국가대표 감독과 계약
  8. 8HJ重·동부건설, 소외층·골프 꿈나무에 3000만원 기부
  9. 9어깨 부상 김우민, 수술 대신 재활로
  10. 10최동원 어린이 야구교실, 출범 11년 만에 프로선수 배출
우리은행
미리보는 제31회 BIFF
스타 만나려면 첫 3일·여유롭게 영화 즐기려면 둘째주 공략
얼굴에 담긴 이야기
코 성형과 마음 성형
궁리와 시도 [전체보기]
노동 운동부터 계엄까지…예술로 사회문제 비추다
비바람 견뎌낸 그의 회화…마침내 ‘고정관념 감옥’서 해방
김민우의 인서트 [전체보기]
응원하고 함께하는 마음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의 가능한 사랑
문화레시피 [전체보기]
‘부산 발레’ 낙동강 타고 새 물길 열다
붉은 빛 조명, 배우·합창단의 호연…눈앞에 다가온 부산오페라하우스
박현주의 신간돋보기 [전체보기]
쉽게 따라 배우는 걷기명상 外
약학박사 연륜이 깃든 시조집 外
박현주의 책 이야기 [전체보기]
노력과 성공은 비례하는가…현대사회 씁쓸한 이면
히말라야 빙하 붕괴로 대참사…더 심각해진 기후 재난
아침의 갤러리 [전체보기]
윤상건-Creature
박지은- little talk-Venice
이 한편의 시조 [전체보기]
경비원 /박필상
자화상 /최은지
주말 영화 박스오피스 [전체보기]
팬덤의 힘 ‘극장판 치이카와’ 1위로…암살자(들) 근소한 차 2위
역사 왜곡 논란에도 ‘암살자(들)’ 정상…애니 ‘극장판 치이카와’ 예매 1위
오늘의 운세- [전체보기]
오늘의 운세- 2026년 10월 15일 (음 9월 5일)
오늘의 운세- 2026년 10월 14일 (음 9월 4일)
오늘의 BIFF [전체보기]
오늘의 BIFF- 2026년 10월 14일
오늘의 BIFF- 2026년 10월 13일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전체보기]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비 오는 가을밤에 읊은 시
생육신 남효온이 가을 강변의 풍경을 읊은 시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