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숙한 사물과 뜻밖의 공간
- 그 만남이 만든 새로운 미학

“익숙한 사물과 사건이 가진 디자인적 요소를 새로운 시공간에 배열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무엇일까.”

김영나 작가가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송이 기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다음 달 30일까지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리는 김영나 개인전 ‘Easy Heavy’다. 디자인과 미술이 경계를 넘어 서로에게 스며들며 만들어낸 색다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한 김영나 작가의 시작은 ‘디자이너’였다. 산업 디자인에서 그래픽 디자인으로 영역을 확장한 그는 디자이너로서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의류 브랜드 코스에서 활동하고 미술관 아트숍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김영나 작가의 벽화 ‘SET v.25:View N’와 그 일부를 캔버스에 올린 회화 ‘조각 25-1’.

그 과정에서 김 작가는 사물과 재료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였을 때 만들어내는 의외의 이야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디자이너가 미술 언어를 썼을 때 달라지는 것, 디자인이 화이트 큐브로 대변되는 전시장으로 들어왔을 때 벌어질 일들,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이런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전시장에서 처음 마주하는 작품은 언뜻 벽 전체를 꾸민 벽화 같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한가운데 정 사각형 캔버스가 숨어있다. 벽화 일부를 캔버스에 옮겨 담고, 이를 벽화 속에 다시 숨겨놓은 것이다. 배경과 작품이 동일한 패턴으로 배열되고, 때로는 함께 때로는 따로 떼서 전시할 수 있는 이 구조는 이미지와 배경, 2차원과 3차원 장벽을 무너뜨리며 디자인과 미술의 경계에 의문을 던진다. 그의 작품은 평면에서 벽으로, 다시 평면에서 캔버스로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김영나 작 ‘Good Job’. 국제갤러리 제공

전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두 번째 공간에 들어서면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오른다. ‘00111/0223’이라고 쓰인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 대형 말풍선 모양, 붉은 바탕에 흰색으로 커다랗게 박힌 알파벳 ‘P’까지. 처음엔 ‘대체 뭐지?’라는 의문과 함께 생경한 느낌이 들다가 이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라는 완전히 상반된 익숙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전시장 모든 작품은 알고 보면 모두 스티커 모양이다.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지극히 평범한 스티커가 모티브였기 때문. 그럼에도 생경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의외의 편집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료를 동원해 재해석해서다. 예를 들어 꽃잎 모양의 나무틀에 펀칭 니들을 동원해 노란색 바탕에 녹색 올리브 가지를 넣어 완성한 작품은 놀랍게도 어린 시절 수없이 봤고 한 번은 받고 싶었던 ‘상 스티커’다. 의미 없는 숫자나 알파벳이 적힌 작품 역시 하나씩 떼어 쓰는 스티커의 모양인 셈.

작가는 나무·아크릴·석고 등 다양한 재료를 동원해 2차원의 평범한 스티커를 3차원의 독특한 작품으로 완성한다. 김영나 작가는 “상 스티커 작품을 보고 어떤 사람은 정치적인 느낌이 난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어렸을 때 할머니가 입던 옷이 떠오른다고도 한다”며 “작품을 통해 내가 전달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을 다른 방식으로 치환해서 표현했을 때 보는 사람마다 어떻게 다르게 이해하느냐가 이번 전시의 중요한 맥락”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