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는 일종의 영화사(映畵史)이기도 하다. ‘밤과 안개’(1956)와 ‘쇼아’(1985), ‘쉰들러 리스트’(1993)와 ‘피아니스트’(2002), 그리고 ‘사울의 아들’(2015)까지, 이를 다루는 작품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만들어져 왔다. 유대인 학살 역사는 끝내 지워지지 않는 근현대사의 원죄(原罪)이기 때문이다. 근대 문명과 합리적 이성, 자본주의와 산업사회의 성취가 체계적·조직적이며, 효율적인 방식으로 살인을 수행하는 데 동원됐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비극을 넘어 현대사회의 바탕에 깔린 비인간성의 원형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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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왜 우리가 홀로코스트를 돌이켜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서늘한 응답이다. 공식 홈페이지 |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는 “왜 우리가 다시금 홀로코스트를 돌이켜보아야 하는가?“는 질문에 대한 서늘한 응답이다. 우선 두드러지는 독특한 점은 학살 현장인 수용소 안이 아니라 장벽 바깥을 다룬다는 데 있다. 빔 벤더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영화의 역사에서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가장 큰 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고. 폭력을 직접 보여주는 방식은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적 반응을 자아내지만, 이미지가 주는 즉각적인 인상의 강렬함은 참상을 가능케 한 원인에 대해 망각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우슈비츠 내부를 보여주지 않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우리는 저편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운드를 통해 폭력이 존재함을 의식하고 사유할 기회를 얻는다. 카메라는 관객의 시선을 지극히 일상적인 시점에 머물도록 강제한다.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와 아내 헤트비히 회스(산드라 휠러)는 겉으로 보면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분리된 공간 내 일상의 평온함은 프레임 바깥의 현실과 대치된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법은 보이지 않는 중력으로 내부에 드리워져 있다. 장난으로 동생을 정원 온실에 가두는 형, 하녀를 학대하는 부인의 히스테리, 수용소 여성과 바람을 피우고는 마치 불결한 걸 접했다는 듯 공들여 자신의 성기를 씻는 회스의 모순된 행동은 이 체제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시대상의 축소판이다.
회스가 선물인 보트를 받기 전에 눈가리개를 하고 나오는 장면은 무척 상징적이다. 신경에 거슬리는 불쾌한 것에서 눈을 돌리고 치워버리겠다는 안간힘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 행동의 반복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시각을 차단할 수는 있을지언정, 들리는 청각까지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외부의 비인간성을 무시하는 듯하지만, 등장인물들은 분명하게 이를 의식하고 있고 이 모순과 균열 속에서 인간성은 망가지고 만다.
그리고 추락하듯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는 회스의 동선을 비추던 카메라는 지금의 아우슈비츠로 넘어가며 그 현재적 의미를 완성한다. 회스 일가족의 귀족적인 전원생활이 그랬듯,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은 누군가의 죽음과 고통, 착취의 산물일 수 있고, 장벽과 유리창 한 장 너머로 절망의 심연이 자리한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의 실상에 대해 더없이 무관심하고, 타자와의 소통을 거부하며 자신의 고통에만 몰두한다. 그러는 한 이 시대는 영영 끝나지 않는, 홀로코스트의 고요한 연장일 수밖에 없다는 침묵 속의 외침이 더없이 뼈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