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보면 어떤 재료를 사용한 것인지 아리송하다. 물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유는 ‘그것’이 워낙 캔버스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에 서서 다시 보면 그제서야 ‘그것’의 물성이 드러난다. 색에 가려 보이지 않던 트실트실한 표면, 그 위를 지나가는 가느다란 선, 불규칙한 절단면이 눈에 들어온다.

박석원 ‘적의(積意)’전. 데이트갤러리 제공

박석원(82) 작가는 한국 추상 조각의 거장으로 꼽힌다. 경남 진해(현재 창원) 출신으로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한 후 1968년과 1969년 잇따라 대한민국미술전에서 국회의장상을 받는 등 20대부터 일찌감치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정치·사회·경제적 혼란기였던 1960·70년대 대한민국 현실을 철 나무 돌 같은 전통적인 재료를 활용한 조각 작품에 녹여냈다. 무언가 만들어 낸다기보다 자연물 내부에 있는 에너지를 밖으로 끌어내는 데 주목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작품 세계는 적의(積意), 즉 생각을 쌓는 시리즈로 수렴된다. 작업은 조각을 넘어 평면 작업으로 이어지는데, 그때 선택한 자료가 한지다. 물질 고유의 성질을 존중하는 작가의 세계는 평면 작업에서도 드러난다. 작가는 한지라는 오브제를 기하학적인 형태로 잘라 캔버스 위에 쌓는다(積). 그 과정에서 종이로서 한지의 물성이 유감없이 빛을 발하면서 물감으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형태를 자아낸다.

붉고 푸른 한지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한 작품에 한가지 색상의 한지만 쓰기에 그의 화면은 모노크롬 분위기다. 특히 바탕의 캔버스와 비슷한 색상의 한지를 활용한 작품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위를 지나가는 가느다란 선이 여러 진폭을 만들어낸다. 부산 해운대 데이트갤러리는 다음 달 10일까지 박석원의 예술 세계를 담은 전시 ‘적의’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