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조재휘의 시네필] 음식·로맨스 뒤에 감춰뒀네, 가부장제를 겨눈 비수

‘프렌치수프’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4-06-27 19:28:19
  •  |   본지 13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트란 안 홍은 과작의 작가이다. ‘그린 파파야 향기’(1993)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다음 작품인 ‘씨클로’(1995)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거머쥐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여름의 수직선에서’(2000)를 기점으로 영화적 공간으로서 베트남을 떠난 뒤 그의 경력은 긴 공백과 부침을 겪으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트란 안 홍 감독의 ‘프렌치수프’ 한 장면.
‘나는 비와 함께 간다’(2009)는 누아르 장르의 플롯에 감각적 비주얼과 과잉된 폭력, 상징적 도상을 얹은 극단화한 시도로 혹평 세례를 받았고, 동명 소설 원작을 각색한 ‘노르웨이의 숲’(2010)과 ‘이터니티’(2016) 또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프렌치 수프’(2023)에서 감독은 ‘이터니티’에 이어 다시 한번 벨 에포크로 돌아온다. 칸영화제 감독상으로 오랜 부진을 씻어낸 이 영화의 영문 제목 ‘The Taste of Things‘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물의 정취’ 정도로 옮기는 편이 적절할 이 중의적 제목이야말로 프랑스어 원제 ’도댕 부팡의 열정‘(La Passion De Dodin Bouffant)보다 영화 성격을 잘 함축하는 표현일 것이다.

영화는 요리를 준비하는 과정을 집요한 탐정의 수사처럼 따라간다. 밭에서 막 캐낸 흙 묻은 채소 이미지로 시작해 다양한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하는 일련의 지난한 노동의 시간. 자연광 촬영을 고집하는 트란 안 홍의 회화적 연출은 푸른색을 머금은 동틀 녘 어둠에서 황금빛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의 밝음으로 넘어가는, 시간의 진행에 따른 조명 변화를 날 것의 재료에서 공예품을 방불케 하는 음식으로의 이행 과정에 포갠다. 여기서 요리는 거칠고 죽어있는 것(재료)을 부드럽고 생명을 머금은 무언가(음식)로 재탄생시키는 창조적 행위가 된다.

베트남에서 프랑스로 무대를 옮겼지만, 트란 안 홍의 구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 이면에는 고색창연한 성차와 공간의 이분법적 대비가 깔려있다. 외제니(줄리엣 비노쉬)의 공간인 아래층 부엌은 찬란한 창조의 산실이자 상징적 자궁이지만, 영화는 클로즈업으로 감미로운 음식의 차짐뿐 아니라 때때로 고단한 노동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외제니의 표정을 담는 걸 잊지 않는다.

반면 윗층 거실에는 멋진 식사를 마련해 준 데 대한 감사를 표시하긴 하지만 그 작업의 피로와 괴로움은 외면하고 속 편하게 미식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도댕(브누와 마지멜)과 부르주아 친구들이 자리한다. ‘안사람’으로서 여성의 동선은 부엌을 중심으로 한 집안과 주변 텃밭에 국한되지만, ‘바깥사람’인 남성은 여가 삼아 곳곳을 자유로이 쏘다닌다.

‘그린 파파야 향기’ ‘여름의 수직선에서’에서 일상을 유지하는 일은 여성 몫인 반면 남성은 애써 가꾼 결실을 ‘먹어 치우는’ 존재였고, ‘씨클로’에는 계급성에 따른 공간 구분이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결혼으로 완성을 꾀하는 가부장제에서 남성은 자기 삶의 많은 부분을 여성에게 내맡기지만, 때문에 의지할 여성의 존재 없이 살 수 없다는 역설적 종속 상태에 처한다. 외제니 사후 자기 아이디어를 뒷받침해 줄 손발을 잃고 폐인이 된 도댕처럼, 겉으로 중년 로맨스와 음식 영화를 가장하지만 트란 안 홍은 그 안에 가부장제의 맹점을 겨냥한 자신만의 비수를 감춰두는 걸 잊지 않는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부산시, ‘부산항선’ 이달 예타 신청…원도심~북항 잇는 24.21㎞ 트램
  2. 2“이래서 당첨 힘들었나”… 최근 5년간 민간아파트 부정 청약 1669건
  3. 3부산 동래·금정구 하늘에 뜬 ‘쌍무지개’…희망과 행운의 메시지
  4. 4HD현대중공업 올해 임단협 잠정합의안 부결노사 갈등 커질 듯
  5. 5[단독]서지영 “기보, 본사는 부산에 두고 부산 기업은 심각한 홀대"
  6. 6[속보]돌아온 ‘부캉이’, 식지 않는 인기…누적 방문객 80만 넘어
  7. 7금융권 광범위 AI 공격 “해킹 시도 더 많을 수도”
  8. 82026 진주남강유등축제 화려한 개막…18일까지 ‘빛의 향연’
  9. 9“의도한 거라면 안 좋다” 축구 금메달 시상식서 제때 오르지 못한 태극기
  10. 10"친구가 총기 들고 탈영"…허위 신고한 20대 벌금 500만 원
  1. 1[단독]서지영 “기보, 본사는 부산에 두고 부산 기업은 심각한 홀대"
  2. 2'좌아하게'? 다시 논란 부른 이 대통령 SNS 정치
  3. 3오세훈, 영화 암살자(들) ‘탄흔 티켓’에 “문화 품격 훼손”
  4. 4[속보]민주당, 국힘 집회에 “극우 유튜버들 박수 세례에 중독된 장동혁”
  5. 5與 “조희대, 국감 출석 불응 의사…불출석은 국회법 위반”
  6. 6李대통령, 금융기관 개인정보 유출에 “철저 조사 지시”
  7. 7'광대극' 조소 이어 미사일로 응답한 北. 좁아진 청와대 입지
  8. 8영화 '암살자(들)' 논란 속 장동혁, 고(故) 육영수 생가 방문
  9. 9국힘, 싱가포르영화제 ‘암살자(들)’ 상영 철회 서한…與 “영틀막”
  10. 10김민석 “차기 총선 주 싸움터는 한강 아니라 낙동강”
  1. 1“이래서 당첨 힘들었나”… 최근 5년간 민간아파트 부정 청약 1669건
  2. 2[속보]돌아온 ‘부캉이’, 식지 않는 인기…누적 방문객 80만 넘어
  3. 3금융권 광범위 AI 공격 “해킹 시도 더 많을 수도”
  4. 4"산업용 차등요금제, 기업의 지역이전 효과 극히 불투명"
  5. 5"차명계좌 적발, 작년 이후 총 3471건…NH농협 가장 많아"
  6. 6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둘러싼 한·미 불협화음 언제까지 이어지나
  7. 7정부의 농축산물 할인 지원 예산 급증… 재정 부담 가중될 듯
  8. 8카카오 월4900원 멤버십 출시…네이버 쿠팡과 3파전
  9. 9이억원 “AI 해킹 가능성…금융권 최고수준 경각심 가져야”
  10. 10미래대응기금, 국감 쟁점 부상…국회 "재원 지속가능 의문"
  1. 1부산시, ‘부산항선’ 이달 예타 신청…원도심~북항 잇는 24.21㎞ 트램
  2. 2부산시, ‘부산항선’ 이달 예타 신청…원도심~북항 잇는 24.21㎞ 트램
  3. 3부산 동래·금정구 하늘에 뜬 ‘쌍무지개’…희망과 행운의 메시지
  4. 4HD현대중공업 올해 임단협 잠정합의안 부결노사 갈등 커질 듯
  5. 52026 진주남강유등축제 화려한 개막…18일까지 ‘빛의 향연’
  6. 6"친구가 총기 들고 탈영"…허위 신고한 20대 벌금 500만 원
  7. 7[속보] “법 위반한 적 없어” 김상욱 울산시장 첫 경찰 출석
  8. 8AI 성착취물 텔레그램방 ‘그놈’…잡고 보니 경찰관
  9. 9“술값 내라” 여러 차례 여자친구 때릴 듯 위협한 20대 집유
  10. 10울산바위 배경으로 사진 찍다 추락한 70대 등산객 숨져
  1. 1“의도한 거라면 안 좋다” 축구 금메달 시상식서 제때 오르지 못한 태극기
  2. 2AG 4연패 위업 축구 대표팀, 병역 관련 언행 논란
  3. 3‘단체전 대역전극’ 펜싱 2관왕 오상욱, 한국선수단 MVP
  4. 4스포츠클라이밍 서채현, 한국 선수단 폐회식 기수
  5. 5[속보] '짜릿한 역전극' 14세 최지운, AG 요트 소년부 금메달
  6. 6이우석, 양궁 리커브 남자 개인전 金…단체전까지 2관왕
  7. 7태권도 송다빈, 여자 67㎏초과급 금메달…겨루기 첫 金 수확
  8. 8서채현, 아시안게임 스포츠클라이밍 여자 리드 금메달
  9. 9한국, AG 남자 축구 4회 연속 금메달…결승 한일전 1-0 승리
  10. 10송교창·최준용 빠진 KCC…‘루이스 킹’ 희망될까
우리은행
미리보는 제31회 BIFF
스타 만나려면 첫 3일·여유롭게 영화 즐기려면 둘째주 공략
얼굴에 담긴 이야기
코 성형과 마음 성형
궁리와 시도 [전체보기]
노동 운동부터 계엄까지…예술로 사회문제 비추다
비바람 견뎌낸 그의 회화…마침내 ‘고정관념 감옥’서 해방
김민우의 인서트 [전체보기]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의 가능한 사랑
환상이 불러일으킨 파국
문화레시피 [전체보기]
‘부산 발레’ 낙동강 타고 새 물길 열다
붉은 빛 조명, 배우·합창단의 호연…눈앞에 다가온 부산오페라하우스
박현주의 신간돋보기 [전체보기]
약학박사 연륜이 깃든 시조집 外
익숙한 물건에 깃든 삶의 온기 外
박현주의 책 이야기 [전체보기]
노력과 성공은 비례하는가…현대사회 씁쓸한 이면
히말라야 빙하 붕괴로 대참사…더 심각해진 기후 재난
아침의 갤러리 [전체보기]
박세연-Find Your Brave
박자현-꾸지 않는 꿈
이 한편의 시조 [전체보기]
기다림의 미학 /윤종순
빨래 /심여혜
주말 영화 박스오피스 [전체보기]
추석 연휴 ‘암살자(들)’ 정상…2위 ‘타짜: 벨제붑의 노래’
‘인턴’, ‘오디세이’ 제치고 정상…허진호 감독 ‘암살자(들)’ 예매율 1위
오늘의 운세- [전체보기]
오늘의 운세- 2026년 10월 5일 (음 8월 25일)
오늘의 운세- 2026년 10월 1일 (음 8월 21일)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전체보기]
조선 중기 문신 택당 이식이 가을의 찬 기운을 읊은 시
할아버지·아버지·본인·아들까지 정쟁으로 죽은 김제겸의 글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