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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 12인’ 기록한 풍류담, 여성 향한 믿음·존중의 진수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9> 여걸전(女傑傳) : 청사(靑史)에 얽힌 홍사(紅絲)

  •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  |   입력 : 2024-07-07 18:44:09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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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착같은 맹렬여성 정점 여태후
- 지략 갖춘 정치가 면모 등 호평
- 정열여성 표본 클레오파트라는
- 재색 겸비한 불멸의 존재로 극찬

- 관부연락선 등 소설 속 주인공들
- 개념있는 요부·투사·순정파 등장
- 장점 많은 인물 묘사도 같은 맥락

나림 이병주는 여성을 존경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나림의 작품엔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이 풍성하게 등장한다. 때로 상상에서 지어낸 캐릭터도 있지만, 대부분 리얼리티가 선명하다. 나림은 모든 여성은 아름답다는 믿음이 있다. 나림은 여성의 장점을 찾아내어 인정해 주고 치켜세워주는 것에 익숙하다.
1994년 홍콩 영화 ‘서초패왕’(감독 나탁요 세기연)에서 공리(왼쪽)가 여태후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장면(위)과 프랑스 화가 장-레옹 제롬(1824~1904)이 그린 그림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부분). 클레오파트라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앞에 선 모습을 표현했다.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사라 안젤은 나림이 환상했던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조화가 극치를 이룬 여성이다. ‘관부연락선’의 서경애는 사랑을 가꾸는 것으로 이념의 혹독한 대가를 이겨낸 투사다. 나림이 늘 죄의식을 느끼며 안부가 궁금하다고 공개한 유일한 여성이다. ‘허상과 장미’ 민윤숙과 ‘그해 5월’ 김선은 남성을 압도하는 개념 있는 요부다. ‘바람과 구름과 비’ 황봉련은 범접할 수 없는 신기(神氣)와 치명적인 에로티시즘으로 무장한 팜므 파탈이나 목숨을 걸고 대시(dash)하는 상남자 최천중에게 몸과 맘을 모두 던질 줄도 아는 순정파 여성이다.

나림은 역사에 기록된 여성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고 연구도 많이 했다. 여태후부터 무측천·마리아 테레지아, 클레오파트라까지 동서양 12명 여걸의 행적을 추적하고 정리한 대하 풍류담을 써서, ‘청사에 얽힌 홍사’라고 제목 붙였다. 청사(靑史)란 역사를 말한다. 아직 종이가 없던 시절 푸른 대나무를 쪼개 말린 죽간에 역사를 기록한 데서 유래한다. 홍사(紅絲)는 붉은 실이다. 역사는 남성·여성이 각각 실오리 되어 새끼를 꼬아놓은 것이다. 나림은 역사에 남은 여성의 자취를 붉은 색깔 실로 묘사했다. 청사에 얽힌 홍사는 he-story 속 her-story란 뜻이다. 문제는 내가 읽은 1985년 원음사 초판 ‘청사에 얽힌 홍사’의 한자 표기와 한글 읽기에 잘못된 곳이 꽤 여러 군데란 사실이다.

청 마지막 황제 부의(傅儀)를 전의(傳儀)로 쓰고, 질투심 강한 여성이란 뜻으로 썼을 투녀(妬女)를 적녀로 읽기도 했다. 그런 탓에 홍사도 홍사(紅絲)로 썼으나 홍사(紅史)의 오기인지 확실치 않다. 둘 다 뜻은 통한다. 다만 나림의 서문 행간을 읽으면 홍사(紅絲)가 더 적절할 듯하다.

■여태후

여태후(241-180 B.C)는 여성으로 권력을 휘두른 중국 역사 최초 사례다. 그것도 매우 포악한 방법으로다. 나림은 이 대목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여성도 역사의 중심이란 사실이 하나이고, 포악함도 지배의 한 형태라는 사실이 또 하나의 의미다. 여태후(呂太后)는 “여성의 광기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해도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의한 해석 못지않은 진실이 발견되리라”는 기대를 충족시켜 준다. 나림은 천재적 음모가이자 비범한 살인자인 여태후를 극적으로 묘사하려고 사마천 ‘사기’의 ‘여후 본기’를 인용한다. 사마천은 여후가 황제가 되지는 못했으나 사실상 황제였음을 인정하고 ‘본기’로 기록을 남겼다.

‘여후 본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후는 고조가 미천했을 때의 부인인데 뒤에 혜제와 노원태후를 낳았다. 고조가 한왕이 되었을 때 척희를 얻어 총애했다.” 스토리텔링이 기막히다. 건달 남편을 황제로 만들었으나 사랑을 빼앗긴 조강지처의 불같은 질투가 선연하다. 잔혹한 성정이 연적 척희를 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후는 개국공신 한신을 척살하고 팽월을 주살했으며 척희 아들 조왕도 독살했다. 연적이자 태자 자리를 두고 다투기까지 했던 척희는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고문을 가한 끝에 ‘인체(人彘·사람돼지)’를 만들어 변소에 던졌다. 인약(仁弱)한 혜제는 그 모습을 보고 실성하여 정무를 포기하고 헤매다 요절했다. 여태후는 고조 사후 황태후와 태황태후가 되어 14년 동안 공포정치의 한 전형을 구사했다.

여태후가 악녀이기만 했으면 굳이 나림이 her-story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사마천의 기록은 이렇다. “여후가 천자의 직권을 대행하는 동안 천하는 평안했다. 범죄는 줄었고, 형벌은 적게 했다. 백성은 전란의 고통 없이 농사에만 전념하여 먹고 마시는 게 풍족해졌다.” 천지는 지배자만의 것은 아니다. 지배계층에선 유씨 세상이 여씨 세상으로 바뀌느라 살벌했고 요란했다. 정적은 제거했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권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민생이 안정되고 넉넉해졌다면 여태후 치세는 달리 평가받을 만하다. 여태후는 공적으로만 보면 상당한 정치가다.

여태후는 남편의 나라 만들기 작업에 정치적 파트너였다. 탁발한 식견에 강인한 성정의 여후는 안으로는 건달기에 세월아 네월아 놀기 좋아하는 남편의 자존심과 호승심을 부추기고 밖으로는 전설 같은 서사를 계속 생산해 후광효과를 구축했다. 건국 후 유방이 차마 어쩌지 못하는 한신 등 개국공신을 술수로 처리하는 악역도 기꺼이 수행했다. 공은 태산인데, 남편은 젊고 애교 있는 척희에 빠졌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아들 대신 척희의 소생을 태자로 세우려고까지 했다. 억센 기질의 여태후는 후계 다툼에서도 기어이 이기고, 남편이 죽자 4일이나 알리지 않은 채 차기 구상에 몰두했다. 처음 몇 년은 수렴청정 다음엔 아예 황제 대행으로 천하를 호령했다. 나림은 “여태후가 불행했다”고 결론짓는다.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69-30 B.C)는 재색을 겸비한 권력자였다. 나림은 “교양과 용자(容姿)가 상승작용을 통해 개성 있는 아름다움을 획득한 미녀로, 숭앙을 받을 만한 여성”이라고 상찬했다. 여성에게는 누구나 클레오파트라의 피와 정열이 흐르고 있으니, 세상에 여성이 존재하는 한 클레오파트라는 불멸이라고도 했다.

나림은 클레오파트라를 이야기하며 먼저 카이사르를 언급한다. 나림은 “카이사르는 실력으로 황제가 될 수 있다면 이런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표준을 보여준 인물로 역사상 그처럼 매력 있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고 극찬했다. 전면의 적을 쳐부수는 데는 용감한 명장이었고 후면의 적을 요리하는 데는 치밀한 정략가였다. 그런 카이사르를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려 준 인물이 클레오파트라다. 전승 이상의 영광, 권력 이상의 강함, 부와 명예 이상의 존귀함이란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400척 웅장하고 화려한 선단으로 나일강을 함께 소항(遡航) 하며 동방 세계를 합친 대로마제국을 구상하고 제왕을 꿈꾸게 한 것이다. 나림은 클레오파트라의 인품과 헬레니즘적 청량 고상한 인생관이 로마 무인의 자질을 높여준 것이라고 해석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동지이며 애인이었다. 나중엔 클레오파트라의 카이사르에 대한 사랑에 모성애적 자정(慈情)이 더해졌다. 나림은 “여자가 쏟는 남자에 대한 사랑의 완벽한 형태는 사랑이 모성애적 색채를 띠게 됨으로 성립된다”고 했다.

카이사르 사후 클레오파트라는 아들 카이사리온을 지키기 위해 안토니우스를 품는다. 안토니우스가 용감하지만 침착하지 못하고 카이사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부(武夫)임을 알면서도 비위를 맞춰준다. 두 사람의 애증은 안토니우스의 자결로 끝난다. 승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엎드려 탄원했으나 묵살되자 무화과 바구니에 든 검은 뱀에 스스로 물린다. 나림은 클레오파트라의 실패는 너무 서둘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이집트는 클레오파트라가 그 어떤 정략을 모색해도 결국 팽창하는 로마에게 망하게 돼 있었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으나 여성으로서는 승리했다고 평가했다. 위대한 카이사르와 사랑했고, 남김없이 정열을 불태웠으며,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성이란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맹렬과 정열

나림은 ‘맹렬한 여성’과 ‘정열의 여성’을 구분했다. 맹렬 여성은 사랑 이외 무엇을 추구하는 악착같은 여성이다. 이를테면 돈 명예 권력에 집착이 강한 여성을 말한다. 의지의 방향에 따라 선악이 원색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정열 여성은 돈과 권력을 추구하다가도 결국은 사랑을 선택하고 사랑을 위해서는 순사(殉死)도 불사하는 여성을 말한다. 나림은 정열 여성의 표본으로 영화 ‘모로코’의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꼽았다. 사막으로 떠나는 외인부대 병사 게리 쿠퍼와의 사랑을 위해 파리의 화려한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모래밭을 따라나서는 라스트 씬은 정열이 무엇인지 행복이 뭔지를 보여주는 극적 장면이다. 나림은 클레오파트라를 정열 여성의 최초 표본으로 여겼다. 나림의 분류에 따르면 여태후는 맹렬 여성의 필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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