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그랑’, 접시가 깨졌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놀란 눈과 입이 닫히지 않았고 본능에 충실한 내 몸은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빠가 달려왔다. “괜찮아?” “움직이지 마!” 아빠 손이 빛처럼 빨랐다. 깨진 유리 조각을 종이에 싸서 비닐에 담고 반짝거리는 파편들을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였다. 마지막에 물티슈로 정성껏 닦아 내셨다. 많이 해보신 솜씨였다.
할머니 생신을 맞이하여 가족 모임을 가졌다. 이모가 예약해 놓은 식당에 갔다. 연예인이 다녀갔다는 소문 때문인지 식당은 북적거렸다. 다이어트를 하겠다던 나의 결심은 보글거리는 계란찜과 숯불에 구운 고기 앞에 무너졌다. 후식으로 나온 잔치국수를 드시던 엄마가 갑자기 우셨다. 펑펑. 당황스러웠다. 짐작은 했지만 괜스레 나도 눈물이 났다.
하나뿐인 오빠가 군대에 갔다. 현실 남매처럼 늘 티격태격했던 날들이 그리워졌다. 입대 전날“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었다면 군대 안 가도 될 텐데...”라며 빡빡 깎은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바보니~! 통일이 됐으면 북쪽 두만강 국경선으로 갈 수도 있지!!” 그럴듯한 오빠의 대답이었다. 통일이 좋은 것인지 순간 헷갈렸다. 군대 간 오빠가 좋아하는 음식이 하필 잔치국수였다. 그렇게 엄마는 눈물 젖은 빵이 아닌 눈물 젖은 국수를 드셨다. 음식 이름이 어울리지 않았다. 잔치국수라니.
오빠는 이공계 석박사들의 군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전문연구요원으로 갈 수도 있는 실력자다. 연구개발 분야에서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일해야 하고 특정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지만, 나라면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는 군대보다는 연구와 학업에 집중할 수 있는 전문연구요원이 나아 보였다. 하지만 오빠의 선택은 짧고 굵은 군대였다.
엄마 또한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어차피 해야 할 숙제, 빨리하는 게 낫다면서 오빠의 선택을 존중했다. 엄마의 판단에 고개가 갸우뚱해지기도 했다. 젊은 날의 외할아버지는 6.25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가 총상의 후유증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는 생전에 기타를 치시며 노래하던 목소리를 녹음해 놓으셨다. 엄마는 운전하실 때면 항상 할아버지의 노래를 들으시며 보고 싶어 하신다. 전쟁 때문에 외할아버지와 일찍 헤어져서 오빠는 군대에 안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정반대의 선택을 하고 입대하던 날도 울지 않던 엄마가 아들이 떠난 후, 그것도 식당에서, 그것도 음식을 드시면서 울음을 터뜨리시는 모습이 고작 18살인 나에겐 이해되지 않았다.
어느 설문조사에서 부모님이 자식에게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은‘아픈 데 없다’였다고 한다. 기숙사형 고등학교에 다니는 나 또한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면 항상 ‘우린 괜찮다’였다. 주말이 되어 집에 가보면 식탁에 약봉지가 가득한데도 말이다. 괜찮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쌓이는 약봉지를 보면서 깨달았다. 오빠가 입대하던 날 울지 않으셨던 것은 담담해서가 아니라 참으셨던 것이다. 눈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들이 걱정할까봐 마음이 아파도, 가슴이 아파도, 이를 앙다물며 이겨내신 것이다. 내가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당장에라도 학교에 오시겠다고 하시는 부모님께 오버하지 말라고 말한 내가 부끄러웠다.
사실‘효(孝)’라는 말에 관심 없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자는 말은 왠지 옛날 사람 말 같았고, 유교라는 사상이 떠오르곤 했다. 4차산업혁명을 내다보는 현대 사회와 어울리지 않았다. 얼마 전이었다. 햄버거 가게에서 주문을 하려고 키오스크 앞에 줄을 섰다. 내 앞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화면을 보시기만 할 뿐 주문을 안 하시고 계셨다. “아.. 빨리 하시지.. 어렵지 않은데..”그때였다. 나를 보며 할아버지가 ‘학생,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라며 도움을 청하셨다. 너무 복잡해서 뭐가 뭔지 모르시겠다는 거였다.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메뉴를 빠른 손놀림으로 주문을 하고 결제를 했다.“할아버지~ 자리에 앉아 계시면 직원분이 가져다주실 거예요”할아버지는 고맙다며 손짓으로 계속 고마움을 표시하시며 자리로 가셨다. 거기엔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셨다 순간 마음이 찡했다.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몇 번의 터치가 다른 사람에겐 큰 도움이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고마워하시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가슴이 벅찼다.
우린 역사 시간에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던지신 독립운동가에 대해 공부한다. 매년 6월이 되면 외할아버지를 포함한 6.25 한국전쟁에서 희생되신 분들의 정신을 받들며“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라는 숭고한 영령의 넋을 기린다. 그분들 덕에 우리는 자유롭게 잘살고 있지만 우리의 안녕 뒤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신 분들 말고도, 비록 지금은 키오스크 작동법에 쩔쩔매는 할아버지이지만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도록 청춘을 불사르셨던 보통의 어른들도 계셨다.
‘효(孝)’는 단지 부모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거나 내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의무적 개념이 아니라 더 큰 뜻이 있다. 이웃하는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기반으로 사회가 구성되고 있다면 그 기초가‘효’의 본질이다. 갈수록 개인주의로 변모하고 있는 작금의 이 사회를 한 번 되돌아보게 하는 가치,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근본적인 힘, 우리가 살아가면서 너무 사소해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다.
담담하게 아들을 군대에 보낸 후 펑펑 우시는 엄마, 설거지를 하다 접시가 깨져도 딸이 다칠까 봐 본인은 상관없다시피 무릎꿇고 청소해 주시는 아빠, 할머니를 위해 키오스크와 씨름하시는 할아버지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앞만 보며 달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흘려버린 소중한 물건, 어쩌면 ‘효’란 잃어본 후에야 더 귀하게 여기는 그런 마음 아닐까?
효(孝)의 다른 이름은 눈길, 인정, 사랑이란걸 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