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건국 7년째 죽음 맞았지만
- 조선경국전 500년간 헌법으로
- 그가 설계한 수도 지금도 여전
- 서울 한복판 그의 뜻·인문 남아
- 백성 마음 얻어야 한다던 삼봉
- 세습군주 보완 ‘재상정치’ 구상
- 왕권강화 원한 태종에 생 마감
- 나림의 유일한 완성 유고 작품
나림 이병주는 경복궁을 자주 찾았다. 산책로도 있고 박물관도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한 달에 한 번꼴로 갈 때마다 정도전을 생각했다. 나림은 역사기행문 ‘조선 왕조의 건축사’에서 “나는 정도전을 생각하면 태종을 생각하고, 이어 한 무제와 사마천과의 관계를 생각한다”고 했다. 정도전을 척살한 태종이나 사마천에게 거세형을 가한 한 무제 모두 대단한 성취를 이룬 듯하나, 위패만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사마천과 정도전은 세월이 얼마나 지나도 감동의 원천으로 살아남아 있다는 뜻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선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하다. 먼저, 그는 누구인가이다. 어떤 집안 자손이며, 누구에게 배웠으며, 누구와 어울렸는지, 어떤 경력을 지녔으며 어떻게 죽었는가를 밝히는 일이다. 다음, 그는 무엇인가이다. 이 대목이 간단치 않다. 그의 생애 자체가 가진 의미,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그의 위상과 평가를 두루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과 과를 나누어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평가할지, 아니면 공과를 넘어 위대함으로 존숭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공과를 따질 것도 없는 그저 역사의 심판 대상일지 판단해야 한다. 역사는 위인의 영욕에 자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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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군 매포읍에 세운 삼봉 정도전(1342~1398)의 동상. 경치 좋은 여행지인 도담상봉을 굽어보는 자리에 있다. 국제신문 DB |
■결기 넘친 조선 설계자정도전은 조선 건국 후 7년에 죽었으나, 그가 쓴 ‘조선경국전’은 조선 500년의 헌법이었고, 그가 설계한 수도 한양과 정궁 경복궁은 지금도 여전하며, 궁궐 전각과 문을 명명한 그 이름들도 그대로다. 도성 내외를 49방(坊)으로 규획하고 지은 이름들도 상당수 남아 있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이 ‘시경’에서 따온 근정전(勤政殿) 강녕전(康寧殿) 사정전(思政殿) 등 전각 명칭에 만족하여, 현판까지 친필로 쓰게 했다. 이성계가 무인(武人)으로 조선의 하드웨어를 구축했다면, 정도전은 그 힘 위에 사상가로 소프트웨어를 마련했다. 서울 한복판에 정도전의 뜻과 인문이 도도하다.
나림은 정도전을 결기의 인물로 그린다. 대의 앞에서 사(私)는 없다. 스승도 친구도 연인도 대의명분을 위해선 과감하게 희생한다. 스승 목은 이색도 그렇게 정리했고, 외우(畏友)이자 당대 학문과 정치에서 쌍벽이었던 포은 정몽주도 제거했다. 연인 소화의 애집(愛執)과 희생도 매정하게 외면한다. 생명의 은인이든 출세의 후원자이든 살 떨리는 연인이든 큰 뜻을 펴기 위해서라면 매섭게 절연(絶緣)했다. 특히 연인에게 매정했던 이유는 불가에 귀의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립고 애틋해도 척불숭유(斥佛崇儒) 국시를 스스로 어길 수는 없었다.
연인을 찾아 위무하는 대신 연인이 없어진 대찰 개원사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나림은 “정몽주는 난세에 각박하지 못해 실패했다”고 했다. 반면 정도전은 모질었다. 역성혁명의 이데올로그가 낭만적이어서 될 일은 아니다.
삼봉은 매사 정면돌파다. 웅지(雄志)를 실현하기 위해선 모험도 감수해야 하고 뒷심도 있어야 한다. “적이 너무 많아” 또는 “타협을 모르는 악질이야”라는 비난도 무릅써야 한다. 정적은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하고, 민심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먼저 피를 보는 것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민심이 자기 쪽으로 오기를 기다리는 모양은 흡사 비바람 속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노옹(老翁) 같을 뿐으로, 하세월이다. 민심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도전은 고려를 전복하는 데도 조선 국초(國礎)를 다지는 데도 일이 지체 않고 되게끔 밀어붙였다.
■탁월한 삼봉, 비명에 간 이유 |
권오창 작가가 그린 삼봉 정도전 표준영정(일부). |
삼봉의 학문은 장대하고 심오했다. 그리고 실용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정치 경제 외교 군사 지리 건축 등 박학다식 그 자체다. 삼봉은 여러 차례 유배와 오랜 재야 생활을 하며 “백성을 저버린 관리가 무슨 정치를 하고 가난을 외면한 학자가 무엇을 연구한다는 거냐. 함께 슬퍼하고 배고파보고 웃어보는 속에서 학문이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다”라 생각했다. 학문이란 종이 위에 쓰인 검은 글자의 표시가 아니라, 글 속에서 새로운 학과 도를 찾아내는 일이며, 그 작업은 민(民)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삼봉이 비명에 간 결정적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당시 권력 투쟁과 유관하고, 더 중대한 또 하나 이유는 재상 정치라는 신념과 관련 있다. 우선, 권력 투쟁에서 패배다. 조선 건국에서 이방원의 공은 정도전과 방불하다. 결정적일 때마다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세를 살피는 역량이 뛰어났고, 적아(敵我) 판별이 분명했으며, 권력 의지도 강렬했다. 야심만만하고, 공적 혁혁하다. 그럼에도 세자 자리는 이복 아우 방석이 차지했다. 정도전은 이방원을 “모험과 의협심이 지나쳐 혁명아 풍운아는 될 수 있어도 개국 뒤의 안정을 요하는 시기에는 부적합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방원은 세자를 죽이고, 아버지를 하야시켰다. 세자를 옹립했던 정도전도 제거했다. 이른바 1차 왕자의 난이다. 2년 뒤 그는 또 한 번의 왕자의 난을 거쳐 3대 임금으로 등극한다.
다음, 왕권과 신권(臣權) 다툼에서 신권이 패배한 것이다. 삼봉은 재상(宰相) 정치를 구상했다. 세습 군주제에서 가장 큰 문제는 혼명강약(昏明强弱)의 임금들이 자리를 잇는다는 현실이다. 성군은 500년에 하나 날까 말까이고, 명군은 100년에 하나, 그 나머지는 대부분이 용군(庸君)과 암군(暗君) 게다가 어쩌다 폭군까지 나타난다. 삼봉의 총재(冢宰)는 그런 현실을 해소하는 전문가 정치 구상이다. ‘조선경국전’의 정의에 의하면 총재는 “위로 임금 받들고 아래로 백관통솔하여 인민 다스리는 재상”이다. 재상(宰相)의 재는 고르고 마땅하게 관리하는 것이고, 상은 돕는다는 뜻이다. 재상은 또한 임금이 바르지 못할 때 바로잡는 역할 격군(格君)까지 해야 한다.
■탁월했던 정치 체제 구상 |
KBS1에서 2014년 방영한 드라마 ‘정도전’ 한 장면. |
삼봉은 “백성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협박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꾀로 속일 수 없다. 마음을 얻으면 따른다”고 했다. 문제는 민심 얻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허구한 날 임금을 갈아치울 수는 없다.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방법은 정치전문가 재상에게 모두 맡기는 것이다. 군주는 남면(南面)하여 존재 자체로 위엄을 발하고, 정치는 능력과 도덕성을 갖춘 재상이 책임지는 삼봉의 구상은 대대로 성군이 이어지는 현실이 아닌 군주제에서 취할 수 있는 한 멋진 방안이다. 다만 임금이 수용해야 한다. 건국의 틀을 온전히 삼봉에게 의탁한 태조는 그 안을 수긍했으나, 강력한 왕권을 지향했던 태종은 거부했다. 삼봉의 뜻은 세종이 다소 절충한 형태로 시행했으나 조선 최고 명군(明君)이기에 가능했던 예외적 사례다.
나림이 여말선초(麗末鮮初) 시대와 인물에 각별히 관심을 갖고 ‘정몽주’에 이어 ‘정도전’을 쓴 계기는 스무 살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림과 친구들은 종종 이상백의 사무실에서 학문과 세사를 논했다. 이상백은 농구계 전설로 체육계를 대표하는 스포츠맨이지만, 한편 역사 사회학자이기도 하다. 1935년 진단학보(震檀學報)에 ‘삼봉인물고’를 발표한 이후, ‘삼봉집’을 편집 발간하는 등 정도전 연구의 선구다. 나림은 한적(漢籍) 도서가 그득한 이상백의 자택을 방문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빌려와 읽고 ‘구약성경보다 더 슬픈 책이다’는 감상을 쓴 적도 있고, 이상백을 통해 원효라는 대사상가도 알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나림의 마지막 역사소설‘정도전’은 나림의 유일한 완성 유고(遺稿)다. ‘정몽주’와 비슷한 시기에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림 사후 1993년 출간되었다. 나림의 글쓰기 스타일은 구상과 자료 섭렵이 끝나면 일필휘지로 써내려 가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 입장에서 혹시나 하며 기대할 유고는 더는 없다. ‘정도전’이 나림의 마지막 역사소설이라 더 아쉽다.
나림은 정도전이란 인물을 재조명해 보다 높은 평가의 꽃다발을 바치고 싶었다. 나림의 결론은 두 가지다. 첫째, 정도전의 비참한 죽음은 원대한 포부와 과단성 있는 정치가 이 나라에선 보람을 볼 수 없다는 운명적 시사 같다. 둘째, 정도전이 세인트헬레나의 나폴레옹처럼 술회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나에게 최대의 적은 나 자신이었다”고 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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