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킹메이커 관상가가 소설 주인공
- 벼슬 못하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 국운이 다한 조선의 운명도 파악
- 새 나라 세우겠다 결심하는 인물
- 바람을 일으키고 구름을 부르며
- 난세에 인재를 움직이는 초고수
- 광대한 스케일·절정의 상상력에
- 에로틱함이 더해진 강렬한 작품
나림 이병주는 소설의 구성을 중시한다. 구성을 “오블라토(녹말과 한천으로 만든 종이로, 쓴 약을 싸서 먹는 데 쓴다)에 싸는 것”이라고 했다. 나림이 말하는 구성이란 포장지 즉 소설적 장치를 뜻한다. 나림의 리얼리즘은 확실히 묘사보다 구성에 있다. 한 맺힌 옥중기를 엑조티즘(exoticism·이국 정취)이 강렬한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만들어 내고, 어이없이 전범으로 몰려 죽은 친구를 위한 만사를 ‘마술사’란 예술소설로 그려낸 것이 대표적인 구성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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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TV 조선이 21부작으로 방영한 역사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 한 장면(왼쪽). 나림 이병주가 쓴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배우 박시후가 주인공 최천중 역을 맡았다. |
하지만 나는 나림의 위대함은 구성보다 오히려 인물 창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림의 작품엔 희귀하고 탁발한 인물도 있고, 잡스러우나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인물도 있으며, 따듯한 오지랖으로 엎어지고 제쳐지고 하는 좌충우돌 캐릭터도 있다. 사막에 불시착한 나폴레옹류와 예외자의 정신을 가진 아웃사이더도 있다. 비범성과 속악성을 동시에 지닌 인물 창조와 묘사가 기막히다.
나림 작품의 캐릭터는 하나같이 개성 강한 유니크(unique)이지만, 꼭 세 사람만 고르라면 나는 ‘산하’의 이종문과 ‘행복어 사전’의 서재필, 그리고 ‘바람과 구름과 비’의 최천중을 꼽고 싶다. 특히 최천중은 나림이 만들어낸 걸출한 캐릭터다. 청말(淸末)의 대학자 왕궈웨이(王國維)는 사람을 가애자(可愛者)와 가신자(可信者)로 나누었다. 가애자는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가신자는 미더운 사람이다. “사랑스러운 사람은 미덥지 않고, 미더운 사람은 사랑스럽지 않다”고 했다. 보통 그렇다. 그런데 희귀하지만 사랑스러우면서도 미더운 사람이 있다. 쾌감과 안정감을 겸비한 경우다. 최천중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사랑스럽고도 미덥다니! |
| 나림이 신문에 연재한 ‘바람과 구름과 비’를 독자가 스크랩한 것으로, 이병주문학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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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천중이 삼전도장을 세우고 삼고초려 끝에 모시고 온 여운 선생이 아흔에 세상을 떠나며 남긴 말이다. “너의 잡스러움을 네 평생에 씻지 못할 것이다. 너의 야심을 너는 평생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의 잡스러움과 야심을 나는 선사(禪師)의 오달(悟達)보다도 성현의 달관보다도 좋다고 느낀다. 너의 잡스러움, 너의 야심으로 인해 너는 앞으로도 한량없는 고통 속에서 살 것이다. 하지만 기(期)하는 바 있는 고통은 기할 바 없는 안락보다 낫다.” 과연 최천중은 야심만만한 잡놈이다.
하지만 천하의 큰 스승 여운이 인정하는 학문과 품성이 있다. 산수도인에게 10년 배운 관상술도 있다. 허물 많은 대갓집을 후려서 축적한 재산도 있고, 대원군과 당당히 맞서 수만금 복채를 얻어 내오는 배짱도 있다. 거기에 더해 문(文)의 강원수, 무(武)의 연치성 같은 천하 인재와 구철룡 박종태 등 충직하고 영민한 수하가 있다. 정숙한 본부인 외에 에로티시즘과 신기(神氣) 충만한 무녀를 비롯한 숱한 여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 상남자가 조선 망국 즈음 새로운 나라 세우기를 꿈꾼다. 나림의 서사와 상상력은 가히 일품이다.
작가의 대가(大家) 여부가 나뉘는 지점은 상상력이다. 지식은 전수되고 사회화하지만, 지혜는 혼자 깨닫고 깨우치는 것이다. 지혜는 자득(自得)이다. 지식은 보통 자료 섭렵과 발견, 그리고 비교의 과정을 거쳐 쌓여간다. 동서고금 자료를 진지하고 성실하게 섭렵하다 보면 발견하게 된다. 발견은 ‘왜?’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고, 비교는 그 답 얻기를 위해 이것저것 비교하며 차이점과 유사점을 형량(衡量)해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차이를 찾아보거나, 유럽 문명과 동양 문명의 유사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나림이 여러 작품에서 보여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비교와 유럽 문명 특성을 동양 문명과 비견하는 대목은 압권이다.
그다음 경지가 창조다. 자료 섭렵하고 발견하며 비교하는 과정은 지식 영역이다. 누구나 절차탁마하면 성취할 수 있다. 하지만 창조는 거기에 상상력이 더해져야 한다. 인간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하고, 소각(小覺)이든 대각(大覺)이든 깨우침이 있어야 한다. 자기만의 무엇이다. 나림의 작품은 전성기에 쓴 명작은 물론이고 아무리 태작(駄作)이라도 인사이트가 있다. 독자가 발견하고 느끼는 인사이트, 대가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위대한 잡스러움최천중은 건국의 베이스캠프 삼전도장이 문을 닫을 때 전국에 걸쳐 1000명 넘는 동지를 얻었다. 품이 크고, 정이 깊으며, 무엇보다 사람의 불행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성격이 주위에 사람이 모이게 했다. 위로는 왕후장상부터 아래로는 시정잡배까지 청탁 불문 신분 불문 두루 교유했다. 대제학 박규수와 그 제자 김옥균 박영효 등과 고담준론하고, 마포 나루 대상(大商)들과 어울리며, 장터에 앉아 누구와도 흔쾌히 수작(酬酌)한다. 나라를 혁(革)하려는 강인한 기상을 가졌지만, 협(俠)만으로는 안 된다는 이치도 이해하는 유연성을 지녔다. 인정의 유대를 넘어 이데올로기적 연대를 구축하려 동학을 후원하는 전략적 마인드도 있다. 호쾌하고 책임감 강하다. 인연을 중시하고, 섭리를 수긍한다.
최천중의 직업은 관상가다. 킹메이커 최천중을 관상가로 설정한 나림의 뜻이 깊다. 관상가로서 첫 번째 작업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명의 운 즉 명의 방향을 잡는 것이다. 최천중은 얼치기나 양아치가 아닌 제대로 수도한 특급 관상가다.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점술이어야만 남을 이롭게 하고,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는 신념이 투철하다. 최천중은 관(官)에서 뜻을 펼 수 없는 자기 한계를 일찍부터 알고, 야(野)에서 잘할 수 있는 일, 꼭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한다. 그 과정에 도덕과 윤리는 없다. 비도덕 부도덕 무도덕을 넘어 모험적이고 주도면밀하다.
두 번째 작업은 국운을 보는 것이다. 최천중은 조선의 국운이 다했음을 알고 새 나라를 세워야겠다고 다짐한다. 명리(命理)는 자연순환의 이치를 기본으로 한다. 성(盛)이 극(極)하면 쇠하고, 쇠망이 극에 이르면 다시 성의 기운으로 돌아선다는 순환 이치가 나라 흥망성쇠에도 적용된다고 믿는다. 물극필반(物極必反) 부극태래(否極泰來)다. 강화도령 철종의 후사를 잇는 문제를 두고 최천중은 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주목한다. 도광양회하며 세풍을 피하는 대원군의 야심을 간파하고 아들의 등극까지 예측하니 최천중은 치명적 공격을 당한다. 구사일생 후 본격적으로 망국과 건국 사이에서 건곤일척 승부에 나선다.
국운(國運), 참 추상적인 단어다. 운이 좋다는 건, 뭘 하려는 열정이 강하고 에너지를 집중한 보람이 있다는 뜻이다. 힘써 애써 하니 좋은 기운이 주변에도 영향을 끼쳐 서로 밀어주고 끌어준다. 나아질 것이란 기대가 충만하고 결과도 난다. 운이 나쁘다는 건, 열정도 시들하고 에너지도 집중이 안 되며 재미도 없다는 뜻이다. 다 된 일도 어그러지고 사소한 일에 울근불근하고, 욕구 자체가 약하다. 운이란 기세다. 국운, 흥망성쇠를 규명하는 다양한 시도 중 하나다.
■광대하다, 그의 스케일세 번째 작업은 바람과 구름을 일으켜 풍운을 타고 등천할 용을 만드는 일이다. 이 대목이 참으로 기발하다. 나림의 상상력이 상상을 절한다. 킹메이커가 되려면 왕재(王才)가 있어야 한다. 최천중은 왕자(王者)의 사주를 맞춰놓고 그를 잉태해 줄 여인을 찾아 나선다. 그 수법과 과정이 상식을 넘는다. 진지하고 에로틱하다. 기어이 얻은 아들을 위해 인물을 모으고 재산을 축적한다. 왕과 개혁적 지식인, 그리고 동학이 합심하여 입헌군주국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거기에 더해 최천중은 명리의 사회적 효용을 체득하고 치부(致富) 방책으로 적극 활용한다. 한 달에도 몇 번씩 바뀌는 한성판윤의 경우에서 보듯 자리는 내일을 알 수 없고, 언제 어디서 칼이 날아올지 몰라 불안하며,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여리박빙(如履薄氷) 살벌한 판에서 생명을 보전하고 권세를 유지하려니, 세도가들이 너나없이 풍수 사주 관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당당하고 신중하며 수 높은 최천중은 권세가들의 약한 곳을 간파하고 족집게 훈수를 둔다. 자신의 철학적 판단에다 용한 무녀 애인의 확인까지 거치니 확률이 아주 높다. 뒷심이 생기고, 거금이 모인다. ‘바람과 구름과 비’, 난세에 바람을 일으키고 구름을 부르며 천하 인재들을 움직이게 하는 나림의 스케일은 광대하고 서사는 장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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