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록의 박력, 허구의 경쾌함…
- 난세를 보듬는 휴머니즘까지
- 최천중의 신랄한 지배층 비판
- 고종·민비·대원군 가리지 않아
- 희망 걸었던 동학운동도 실패
- 17인 지사 새로운 건국 꿈 꿔
‘바람과 구름과 비’ 10권을 정독하고 재독(再讀)한 느낌은 먹먹함이었다. 먹먹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역사와 권력과 개인 사이의 오묘한 함수관계를 서사로 풀어주는 ‘사기(史記)’의 감동이다. 나림 이병주는 그 무엇으로도 명쾌하게 해소할 수 없는 역사-권력-인생 간 함수관계를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풀어준다. 실록의 박력에다 허구의 경쾌함이 더해져 그 이야기는 ‘삼국지’나 ‘수호지’보다 훨씬 더 유익하고 흥미롭다. 강호의 자유로움과 은원(恩怨)의 허망함을 속도감 있게 묘사하는 무협지 풍마저 있다. 통속성과 진지함의 조화가 천의무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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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한성으로 압송된 전봉준과 조선 제26대 왕 고종, 개화파 김옥균. 나림의 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 주인공 최천중은 고종을 비롯한 지배층을 비판했으며, 동학에 희망을 걸고 새 나라 세우기를 꿈꿨다. 국제신문DB |
다음, 돌아보기와 내다보기가 겸전한 문학적 안목에 경탄(敬歎)했다. 그 힘든 시대 그 무거운 이야기를 규방의 속삭임부터 시작하여 뜻 높은 지사의 포부와 좌절한 장부의 탄식을 거쳐 조선을 두고 벌이는 열강의 각축 등 국제관계까지 그렇게 종으로 횡으로 잇는 소설로 쓸 수 있다니 그저 고맙게 흔상(欣賞·좋아하여 즐김)할 따름이다. 나림은 세사의 앞날을 굽어보기 위해 기왕지사를 소상하게 챙기는 참 고상한 습관이 있었다. ‘바람과 구름과 비’는 나림의 유불도(儒佛道) 섭렵과 동학 이해 또한 아낌없이 드러난 작품이다. 돌아보기와 내다보기가 균형을 이루려면 과거·현재·미래를 통시(通視)하는 것에 더해 약자를 따뜻하게 대하는 문명적 시선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바람과 구름과 비’에는 나림의 묵중한 휴머니즘과 깊은 인문이 진하고, 시대를 꿰뚫어 보는 안목과 인간에 대한 통찰이 선명하다.
어느 세대나 자신의 시대가 가장 힘들다고 여긴다. 예민하고 통찰력 있는 사람일수록 그 시대 의식은 더욱 철저하다. 2500년 전 공자는 자신의 시대가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 이후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난세라고 생각했고, 2000년 전 예수는 자신의 시대에 마지막 날이 닥칠 것이라고 예언했다. 선지(先知)들은 한편으론 후생가외(後生可畏··미래세대가 기성세대보다 더 뛰어남)를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의 시대가 말세라고 탄식했다. 세상은 언제나 난세이며 자신이 사는 시대는 늘 말세다.
■“생선은 머리부터 썩는다”1920년대 이 땅에 태어난 세대도 예외가 아니다. 나의 부친 세대인 1920년대 생은 유난히 많은 곡절을 겪었다. 나림 이병주처럼 생각이 깊고 정이 많으며, 고비마다 생사를 넘나든 경우라면 더욱 시대 의식이 투철할 수밖에 없다. 그 세대는 바로 전 세대에 있었던 망국의 전말과 정서를 들어 알았고, 3·1운동의 후과(後果)로 주위 어른들이 고초 겪는 모습을 목도했다. 두보가 ‘춘망(春望)’에서 외던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를 실감하며, 망국의 현장에 있었다.
‘바람과 구름과 비’ 주인공 최천중은 1920년대 생의 할아버지 세대다. 철종 말년 세상에 나와 고종 시대를 살며 500년 된 나라가 저물어가는 현장에 있었다. 소설은 철종 14년 1862년부터 고종 32년 1895년까지를 망라한다. 그 난세 풍운에 풍운남(風雲男) 최천중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기막힌 곡절을 겪으며 정면으로 맞선다. 산천운명(山川運命)이란 게 있다. 이를테면 전쟁이나 자연재해 같은 것이다. 어이없음과 부조리함에 그저 황망할 뿐인 상황. 발버둥 치고 아무리 애써도 어쩌지 못하는 무력감 상황. 한마디로 망연자실. 망국도 그런 맥락이다. 망하는 것은 망하게 두어야 한다. 아니 더 빨리 더 확실하게 망하게 부추겨야 한다.
최천중은 조선이 망하고 있고 이미 망했어야 하며 하루빨리 망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지배자의 무능이다. “생선은 머리부터 썩는다”는 말이 있다. 나라나 민족의 쇠망은 지도층의 부패 무능에서 시작한다. 최천중은 고종의 무능과 매관매직, 나라보다 사직, 사직보다 사욕을 먼저 챙기는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결정적일 때마다 물러서고 도망가며 자기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한마디로 겁 많은 혼군(昏君)이었다. 내부 권력투쟁에는 능숙하나 국제정세엔 어두우면서도 집요하게 정국을 좌지우지하려는 민비 또한 준엄하게 평가한다.
특히 신령군이란 무당에게 휘둘리는 대목이 아연하다. 나림은 신령군이 큰 스승으로 모시는 황봉련이 민비와 만나 “신은 믿으시되 낭비하지는 마소서”라고 충언하는 장면을 공들여 구성한다. 대원군은 카리스마도 있고 결단력도 있어 일부 개혁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으나, 수구적이고 폐쇄적이어서 당대의 카운터파트 청의 이홍장이나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대세를 논하기는 어려웠다. 그 크리티컬(critical)한 시기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선견지명은 없었다.
둘째, “여기 인물이 있다” 하며 내세울 만한 인재가 부족했다. 불만에 가득차 극적 변화를 바라는 민심을 수람 할 영웅이 없었다. 그나마 가장 역동적인 세력이 개혁파였으나 모두 넘치거나 처지거나 약관의 서생들이었다. 민심을 모을 줄 몰랐고 조급했으며 외세 의존적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실전 조언이다. “스스로 지키려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돕지 않는다”.
최천중은 미국 푸트 공사를 여러 번 만나 세상 견문을 넓힌다. 시 한 수로 위안스카이의 마음을 산 절세 시인 민하와 청관(淸館) 관리 소민을 통해 청의 사정을 소상히 듣고 있고, 독일 공사에게서는 영세중립이란 방책도 배운다. 최천중은 개화파 인사들의 뜻과 기상은 가상히 여기지만 미더워하지 않는다. 갑신정변 전 거사 자금을 요청하는 김옥균에게 출사표를 확인하고 윤치호를 통해 구상도 듣지만 끓기도 전에 넘치는 경박함과 무모함을 크게 우려한다.
개혁은 목숨 걸고 루비콘강을 건너는 모험이고, 건너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끈기 있게 밀고 나가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인품으로 품고 세력으로 몰아가야 한다. 정치는 언제나 결과로 평가받는 것이지 의도가 중요한 건 아니다. 김옥균파는 세도 약하고 품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세상을 너무 얕잡아 봤다. 삼일천하라고 할 것도 없는 삼일의 돌풍이었다. 김옥균은 왕을 모시고 대궐 내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수다를 떨었을 뿐, 어느 누구한테 호령 한번 못 하고 궁서(窮鼠)의 몰골로 일본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나림의 김옥균 평가는 냉정하다. “모사(謀事)의 재(才)는 있으나 성사(成事)의 능(能)은 없는 인물”이다. 다만 김옥균이 부관참시 되고 양화진에 효수되자 최천중은 사흘 동안 칩거하며 애도하고 유족에게 거금을 보내 조문하는 정은 보인다.
셋째, ‘조국의 부재’ 상황에서 백성은 자포자기했다. 최천중은 조정을 내부에서 뒤엎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백성이 봉기할 때 호응할 발판을 마련하려 한다. 외우(畏友) 곽선우가 이렇게 충고한다. “백성이 모두 썩어 있소. 분토(糞土)로 담을 쌓을 수는 없소. 썩은 백성이 난동하고, 썩은 백성이 배신하고, 썩은 백성이 구경하고….”
■동학에서 희망을 보다그래도 동학에 희망이 있었다. 최천중은 기본적으로 장자 풍이지만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통독하고, 책사 박종태를 통해 최시형과 연락하며 전봉준을 돕는다. 수하 연치성은 정예 별기군을 조직해 공주 전투에도 참전한다. 최천중은 왕재(王才) 왕문을 중심으로 강원수 김웅서 등 개혁 인사를 신분 구별 없이 탁발한 재능만으로 충원하고 동학의 세와 이념을 더해 망조 든 조선을 기꺼이 버리고 새로운 나라 세우기를 꿈꿨다.
꿈은 아무리 크게 꿔도 괜찮다. 하지만 동학운동은 처참하게 좌절한다. 이유는 많지만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지배자의 이익을 침범하는 사상은 서학 천주교이든 동학 시천주 사상이든 모두 사악하다. 목을 베거나, 난을 일으킨다면 청병 일군 누구든 불러와 섬멸해야 한다. 기득권은 강고했다. 둘째, 남접과 북접의 대립 등 수양 위주냐 보국안민을 위해 봉기해야 하느냐를 두고 동학은 일사불란하지 못했다.
전봉준은 일세의 대인물이었으나 전국적 봉기를 추동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주류 유림이 이단시했다. 김옥균은 위로부터 혁명하려다 민심을 얻지 못해 실패했고, 동학은 아래로부터 혁명하려다 상층부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했다. 슬픈 일이다. 최천중의 큰 꿈은 17인 지사가 모여 나라 안의 나라 신국(晨國)을 세우는 것으로 바뀐다.
새벽이란 이름의 망명정부다. ‘망명’, 나림에겐 의미가 각별한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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