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자에게 왕좌를 내준 제왕
- 조훈현 국수 역할 맡아 열연
- 韓 바둑사 최고 명승부 재연
- 이창호에 처음 패배하는 신
- 영화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
- 이창호 역 유아인 리스크에
- 넷플릭스→ 극장 개봉 승부수
- 무표정 속 소용돌이 치는 감정
- 영화관 화면으로 보길 권해
창과 방패, 공격형과 수비형, 쾌속을 자랑하는 제비와 승부를 서두르지 않는 강태공, 초반부터 무섭게 몰아치는 싸움의 달인과 끝내기의 초고수, ‘이기기 위해 싸우는’ 자와 ‘싸우지 않고 이기려는’ 자…. 여기, 스타일이 달라도 너무 다른 스승과 제자가 있다. 한국 바둑의 ‘전신(戰神·전투의 신)’ 조훈현(이병헌)과 ‘신산(神算·신의 계산)’ 이창호(유아인)다. 26일 개봉하는 ‘승부’(감독 김형주)는 한국 바둑사 명승부로 기록된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의 사제 대결을 그린다.
■청출어람 한 제자 앞에 선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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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승부’에서 조훈현 국수를 연기한 배우 이병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 바둑의 전설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의 사제 대결을 그린 ‘승부’에서 이병헌은 조훈현 국수를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
승부의 세계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 그러나 견고할 줄 알았던 영광의 제국이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이 집에서 가르치던 어린 제자에 의해 무너진다면, 그건 영광일까 비극일까. 아니, 이 만남은 운명일까 숙명일까. 스승을 이겨버린(?) 제자는 대국이 끝나자 미안해서 입을 닫고, 청출어람 해 버린 제자 앞에서 스승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조훈현 국수(國手)를 연기한 이병헌은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연기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전했다.
“조훈현 국수가 제자 이창호에게 처음으로 지는 날, 더 이상 방법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안 되나?”라고 혼잣말을 한다. 그 장면부터, 대국장을 빠져나와 담뱃갑을 구기는 장면까지가 이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독 테이크도 많이 갔다. 며칠 뒤 감독님께 다시 찍을 수 있느냐고 물어볼 만큼 욕심이 났다”며 복잡다단한 조훈현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깊은 고민을 했음을 알렸다.
바둑은 치열한 두뇌 싸움인 동시에 엉덩이 싸움이다. 다른 스포츠에 비해 정적인 만큼, 배우로서는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난도가 높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병헌은 그런 부분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왔단다.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무표정을 짓고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환희와 절망, 긴장 등이 소용돌이치며 폭발한다. 그런 감정의 떨림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극장에서 보셨으면 좋겠다”며 연기 고수다운 답을 내놓았다.
바둑 레슨을 받고 혼자 연습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바둑돌을 둘 때의 ‘포스’였다. “바둑 고수들을 보면 마치 양면테이프가 붙어 있는 것처럼, 바둑돌을 바둑판에 딱 갖다 붙이지 않나. 그런 손짓과 프로다운 포스, 그 울림이 얼마나 조훈현 국수처럼 보이느냐가 저에겐 큰 숙제였다”고 밝혔다.
실존 인물 연기는 이병헌에게 처음은 아니다. ‘남한산성’(2017)에서 순간의 치욕을 참고 후일을 택할 것을 주장하는 이조판서 최명길로 분했었고, ‘남산의 부장들’(2020)에서는 역사적 평가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극 중 이름 김규평)를 맡아 열연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승부’에서 연기하는 조훈현은 앞선 영화들과 달리, 동시대에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조훈현 국수는 지금도 현역으로 계시니까,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분의 버릇이라든가, 외형이라든가, 관찰의 대상이 눈앞에 계시기에 연기에 용이한 부분이 있었다. 반면 현존하지 않는 과거 실존 인물들의 경우, 베이스는 실화지만 ‘당시 실제로 어떤 감정이셨을까’ 상상해 가며 연기해야 하기에 힘든 지점들이 있다. 그러나 전자든 후자든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건, 픽션에서 창조된 인물을 연기할 때보다 제한되는 것들이 많긴 하다.”
■“아들이 선정한 1위 작품은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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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승부’의 한 장면.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
‘승부’의 후반부는 제자에게 패한 조훈현이 절치부심 끝에 다시 정상에 도전하는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40대에 정상에서 물러난 바둑 고수는 대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게 수순. 그러나 조훈현은 달랐다. 제자와 둔 바둑을 ‘복기’한 끝에 다시 부활한다. 조훈현처럼 이병헌도 인생의 여러 굴곡을 넘어왔다. “1990년대 데뷔하자마자 운 좋게 드라마로 사랑받았지만, 영화 네 편이 내리 망했다”고 밝힌 그는 “당시 충무로는 신인이 두 편 망하면 다시는 캐스팅을 안 하는 분위기가 있었기에, 충무로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혔다”고 부언하며 웃었다. 물론 그것이 미스터리가 아니라, 충무로의 선견지명이었음이 시간을 통해 증명됐다. ‘내 마음의 풍금’(1999)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거치며 영화배우로 입지를 굳힌 그는 현재 충무로의 든든한 허리다.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한 글로벌 스타이기도 하다.
조훈현이 바둑판에서 ‘신’으로 불리는 것처럼, 이병헌 역시 연기판에서 ‘연기의 신’으로 통한다. 제자에게 바둑을 사사했던 조훈현처럼, 그도 후배들에게 연기 조언을 할까. “연기라는 게, ‘뭘 열심히 하면 더 좋아질 거야’라고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정답이 없는 분야라서 나도 고민을 많이 한다. 그리고 나는 연기 전공이 아니다. 연기 학과 선생님들이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치는지도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후배들에게서 질문이 들어와도 명확하게 대답 못 하는 경우가 많다”고 자세를 낮춘 후 “이젠 연기 잘하는 보석 같은 후배와 동료가 정말 많다. 누군가의 연기를 보며 ‘내가 저걸 할 수 있을까’ 감탄할 때도 있다. 그런 배우들을 현장에서 만나면 경쟁심이 아니라, 좋은 영화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이 된다. 이번 영화도 그랬다”며 동료애를 드러냈다.
‘승부’는 개봉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극장 개봉을 목표로 2021년 크랭크업 했지만, 팬데믹 여파로 2023년 넷플릭스로 플랫폼이 변경됐다. 하지만 같은 해 주연배우 유아인의 마약 투약 사건으로 공개 일정이 보류되면서 다시 극장 개봉으로 승부수를 띄우게 됐다. ‘승부’ 측은 유아인의 분량을 그대로 살렸지만, 예고편 등 홍보 과정에서는 그의 모습을 완전히 지웠다. 홍보는 오로지 이병헌의 몫으로 남았다. 이병헌의 속 마음을 모두 알 길이 없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후배에게 위로를 전했다.
“이창호 국수는 돌부처 같은 사람이다. 말이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든 바둑기사로 유명하다. 그런 이창호 국수를 연기한 유아인 씨도 현장에서 늘 과묵한 모습이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 자기 캐릭터에 빠져 있으려고 애를 쓰는구나.’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자기 캐릭터를 참 잘 해냈구나, 다시금 생각했다.”
유아인 리스크 속에서 공개되는 작품이지만 충성 고객 한 명은 확실히 확보했다. 이병헌의 아들이다. 아들이 꼽은 아빠의 출연 영화 중 1위가 ‘승부’란다. 아들에게 틈틈이 영화를 보여준다는 이병헌 이야길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이병헌이 연기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영화광이었던 그의 아버지 영향이 큰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네다섯 살 때부터 저를 무릎에 앉히고 ‘주말의 명화’를 보여주셨다. 흑백에 서부영화가 대부분이었다.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말 타고 다니면서 총싸움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빵을 콩죽 같은데 찍어 먹는 장면이 꼭 나왔는데, 어린 마음에 너무 먹어보고 싶었다”는 이병헌. 그런 그이기에 훗날 할리우드에서 (서부영화의 고전 ‘황야의 7인’을 리메이크한) ‘매그니피센트7’(2016)을 찍을 때의 심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고. “콩죽 먹는 장면도 실제로 찍었는데, 너무 신기해서 계속 그것만 먹었다”는 그는, “확인해 본 결과 맛은 별로”였단다. 그러나, 맛보다 강렬한 추억이 그에게 남았다. ‘승부’는 또 이병헌 연기 인생에 어떤 추억을 남길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