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기반 활동 정광모 작가
- 리얼리즘 버무린 SF소설집
- 미래 매개 보편적 감정 담아
- 상상 가득한 이야기 공감도

작가 정광모(사진)의 새 소설집 ‘멸종과 이혼의 연대기’는 ‘정광모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광모 소설가의 지향과 개성을 잘 내보이는 단편소설 여러 편이 치열하고 다채롭게 펼쳐진다.

어떤 작품은 지식·정보·첨단·미래 등 그의 특기로 꼽히는 요소가 탄탄하게 조직돼 주제의식을 밀어 올린다. 그런 작품은 낯설고 새로운데, 결국 인간 보편의 감정이자 고민거리인 사랑·공포·이상 추구 등과 만나며 지금·이곳 독자의 공감을 일으킨다. 기성세대에 속하는 중견 작가로서 이 시대 삶의 현장에서 끌어올린 익숙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품도 있다. 쉽게 말해, 미래와 현재가 섞였다. 작품 배경은 일관되게 작가가 사는 부산이다.

지역 문단 차원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도 짚어둘 필요가 있다. 부산 소설계에서 ‘지식·정보·첨단·미래’를 매개로 하는 작품을 꾸준히 내놓는 작가가 흔치 않다. ‘멸종과 이혼의 연대기’에 실은 소설 7편 가운데 ‘첫 이혼’ ‘휴먼 장르’ ‘멸종을 기록하는 방법’은 확연히 미래와 과학기술을 중요한 수단으로 삼는다. ‘유라시아 탑승권’도 어쩌면 미래 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정광모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번 작품집에서는 SF로 불리는 작품과 리얼리즘으로 불리는 스타일이 함께 들어 있다”고 밝혔다. 그가 SF와 리얼리즘 소설을 함께 쓰는 작가다.

수록작 ‘휴먼 장르’는 기발하다. 머지않은 미래. AI가 더욱 발달해 사람에게 문학을 가르친다. AI가 스승이 돼 문학상 응모 요령부터 작품 표현까지 확실히 가르치는 방식이 아직 완전히 ‘양성화’되지는 않아, ‘음으로 양으로’의 분위기가 있다. AI와 인간은 모든 면에서 스케일 자체가 아예 다르다. AI는 한 글자 한 글자를 인식하는 게 아니라 ‘하스키 이미지’를 활용한다. 이미지에 들어있는 글자를 통으로 접수한다는 뜻이다. 주인공 AI는 소설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쓴 ‘팡데아 은하의 전설’은 인간들이 쓰는 단위로 계산해서 999권이 한 책으로 묶여있다. 그렇게 해서 999책이니 999권을 999번 곱한 양이다.” 이렇게 AI가 생성한 문학 작품을 다른 AI들이 읽고 향유한다. 예컨대 달에 있는 지구방위대에 속한 군사용 AI들이 소일거리로 즐긴다. 이 AI 독자들에게 ‘휴먼 장르’(인간이 쓴 문학 작품)를 주면 정말로 싫어한다. 구토하고 욕한다. 너무 뻔하고 정보가 적고 재미도 도통 없기 때문이다. 위기를 느낀 인간들은 주인공 AI가 문학 작품을 생성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자 군사용 AI들에게 심각한 프로그램 오류가 생기는데. 자! 과연 어떻게 될까.

‘멸종을 기록하는 방법’ 또한 빼어난 상상력과 구성력을 보여준다. 현생 인류(사피엔스)가 개발 탐욕과 기후 위기를 제어하지 못해 망한 뒤 엄청난 세월이 흐른 시점, 긴꼬리원숭이에서 진화한 긴꼬리족이 높은 지능을 갖춰 세계를 지배한다. 사피엔스가 남긴 유적·유물을 긴꼬리족이 조금씩 발굴하며 벌어지는 소동과 격랑이 흥미진진하다. ‘첫 이혼’은 AI를 장착하고 완벽한 배우자로 프로그래밍이 된 로봇과 인간이 겪는 일을 소름 끼치는 실감을 바탕으로 풀어낸다. 이들 작품은 한결같이 지금·이곳의 인간을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부산~유라시아 철도를 개통하면서 시행한 탑승권 경품 행사에 당첨된 한 가족을 통해 우리 삶의 가치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유라시아 탑승권’’은 지금 당장 연극으로 만들어도 좋을 듯한 짜임새와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봄을 걷다’ 등 현재 우리 삶을 담은, 리얼리즘 작품에 속하는 작품은 묵직하다.